꽃, 나비, 나무, 하늘, 바람, 별, 강물, 물고기, 강아지 등등으로 가득한 친환경적이고 도교적인 세상. 그러나 그 세상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이 있으니. 그 순간, 꽃은 숨겨두었던 가시를, 나비는 날개의 상처를 드러내고, 나무는 누군가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화살이 되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강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그 바닥 위에서 물고기는 힘겹게 파닥대고, 강아지는 어둠을 향해 컹컹 짖는다. 루시드폴 노래를 듣다 보면 가끔 그런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는 미선이 시절부터 이미 "송연" 이나 "치질" 등 가시가 돋힌 가사들을 써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독집부터는 서정의 정서가 지배적. "사람이었네"와 앨범 <레미제라블>의 몇몇 노래들에서는 세상의 불의에 선연히 분노하는 것 같긴 했으나, 그 표현이 절대로 직접적인 일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은유의 차원에 머물 뿐이었다. 현실에의 "참여"라 해도 지극히 은밀하고 소극적이이어서, 세상을 향해 열린 창 없이 오직 자기 안에 표현된 세상을 노래하는 모나드 같은 느낌. 즉 근본적으로 내향적(introspectif)이란 얘기고 그 노래도 결국은 내성(introspectoin)이라는 얘기다. 부적응자이거나 자폐아이거나 자급자족형이어서라기보다는, 세상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대는 태생적 이방인이어서라는 것이, 내 자신의 경우를 투사한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해석.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으로만 보자면 앞의 세 병리와 다르지는 않겠으나.
이러한 내향적 인간 특유의 현실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는 것과 처음에 말한 그림자는 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두움이다. 평소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숨겨 놓지만 가끔씩 드러나고 마는 어둠의 그림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은 그 어둠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었다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꽃은 말이 없다> 앨범에 실린 "가족"이라는 노래는 그가 만든 중 최고로 어두운 것 같다. 듣다 보면 지난 세기 초, 민중의 빈곤하고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른바 사실주의 가요(chanson réaliste) 생각이 난다.
다락방에 모여 사는 가족이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무너지지 말자고 소리친다. 아이도 소리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엄마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듬성듬성 붙어 있는 천정의 벌레들/금세 울음이라도 터질 듯한 얼굴들"와 같은 묘사는 무척 사실적이고 섬뜩하다. 조르주 브라상스의 "기도(La prière)"나, 좀더 멀게는 토머스 하디의 <주드>에서 "because we are too many"라는 말을 남겨 놓고 동생들을 죽이고 스스로도 목을 맨 어린 소년이 생각나는 대목.
그 중에서도 특히 "가족들이 나오는 꿈은 늘 불안하지/온통 걱정스런 눈빛만 가득하니까"라는 구절은 들을 때마다 도망가고 싶어진다. 이 노래를 들은 뒤로 실제로 꿈에 가족이 나오면 불안해지기도 했다.
바로 그 가족이 나오는 꿈을 며칠 전에 꾸었다. 야학 모임에 가는 꿈. 개교 몇 주년이거나 기타 기념 행사였을 것이다. 할머니도 오셨다.
이게 왜 가족이 나오는 꿈이고 또 "야학"과 "할머니"가 무슨 연고인가 할 수 있겠는데,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보통은 상관 관계가 있기 힘들겠고, 하다못해 자유연상으로도 연결이 자명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내 개인사의 맥락에서는 그러하니, 나의 친할머니가 바로 서울의 한 야학에서 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계셨고, 나는 바로 그 야학에서 교사로 활동을 했던 것이다.
다시 꿈에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내게 "이 분이 당신의 할머니되시는 분이다"라고 소개해주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분명 보통은 아닌 상황. 그러나 이 또한 그럴 법도 한 것이, 나는 친손녀라 해도 못 뵌지 5년이 넘은 데 반해, 야학의 제자들과 선생들은 가끔 모여서 찾아뵙고, 또 최근 "폐교" 행사에서는 다들 모였다고도 하니. 그런데 내 눈앞의 할머니는 몹시 앳된 얼굴과 표정이었다. 그저 아흔을 넘기고도 정정함을 유지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소녀였다. 그것도 사춘기 소녀. 수줍어하면서도 또 눈빛은, 걱정스럽기커녕, 천진난만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 와중에 생각했다. 다들 모이는 거면 그도 올까? 그랬더니 실제로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 그가 보였다. 교수가 됐다더니, 회색 정장을 한 말쑥한 차림. 가는 눈. 내리깐 시선.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그럼에도 나는 단숨에 알아 보았다. 할머니는 알아뵙지 못했는데. 그도 나를 보았는지, 알아보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알아채기 전에 꿈에서 깼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인물. 최근에는 할머니 생각이 부쩍 늘었다. 어느새 아흔을 훌쩍 넘기셨는데, 빨리 가서 뵈어야 하는데. 문제의 "그"는 계속 잊고 있다가 얼마 전에 불현듯 생각이 났다. 궁금하기도 하고 또 그리워지기도,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보지 못할 것이다.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족(과 한때 최소한 가족만큼, 아니 가족보다 훨씬, 친밀했던, 일종의 유사가족)이 나오는 이 꿈에서 모종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걱정스런 눈빛이 가득해서가 아닌, 그와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눈빛이 걱정스러우면 차라리 좋겠다. 눈빛이 아예 사라지거나, 아니면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을 것, 그것이야말로 더 걱정되고 또 걱정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오래 전 두고 온, 너무 오래 비워둔 내 자리, 지나온 시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한 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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