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수퍼마켓에서 산 작은 장미 화분. 내 손에 들어온 많은 식물들이 그랬듯이(식물 뿐이랴, 동물을 포함, 거의 모든 생명체들) 얼마 가지 않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용케 잎과 줄기는 살아남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그래도 꽃을 피워내기에는 부족한 모양인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꽃이 피었다. 꽃망울이 무척 큰 데다 노랗기까지 하니 해바라기 부럽지 않다.
노란 장미 하면 단연 <클레브 공작부인>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느무르 백작과의 남모르는 사랑에 애태우는 그녀. 궁중무도회에서도 그저 멀찍이서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꽂힌 노란 장미를 보는 순간 그녀의 안타까움은 보상되고도 남는다. 노랑은 금발인 그녀에게는 금지된 색깔. 금발이나 장미 둘 중 하나가 색이 죽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위해 백작이 대신 단 노란 장미는 그가 그녀에게 보내는, 오로지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은밀한 마음의 표시였던 것이다.
다소 잊혀진 편에 속했던 이 작품이 새삼 상기된 일이 비교적 최근에 있었다.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뜻밖에도 전대통령 사르코지. 참으로 뜻밖이기도 한 것이 사르코지는 프랑스 공화국의 전통이었던 말하자면 지식인 혹은 문인 대통령, 즉 문화 역사 예술 등에 조예가 깊은 역대 대통령의 계보를 깨뜨린 걸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지식인과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외면을 받은 걸로도.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인데, 그 내막인 즉슨, 그가 내무부 장관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2006년, 공무원 선발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프랑스에선 전반적으로 일반 교양(culture générale)에 대한 요구가 지나치다, 아니 공무원 되는데 라파예트 부인 소설이 무슨 소용이냐, 공무원 구두시험에 <클레브 공작부인>을 출제하다니, 이 무슨 새디스틱하고 어리석은 일이냐, 라는 요지의 발언을 해서 엄청난 반발을 샀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식인 및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감독 크리스토프 오노레는 항의의 표시로 바로 그 <클레브 공작부인>을 각색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덕분에, 역설적으로, 혹은 도착적으로,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판매량이 폭증하고 새 판본도 여럿 출판되는 효과가 나왔다고.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도 아마 당시의 열풍에 가담하면서였던 것 같다.
"사르코지 효과"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례. 당시에는 대학 민영화에 반대하는 대학생 및 연구진들의 장기 파업이 한창이었는데, 소르본느 문과대학 학생들이 집회에 노란 장미를 한 송이씩 들고 나왔던 것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을 읽었거나, 꼭 읽지 않았더라도, 시장논리와 실용노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론 뿐 아니라 실천까지도 포괄하는 영역이 존재하고 또 필요하다 생각하는 이들 사이의 은밀한 공모의식과 항거의 표시. 이래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프랑코필로 남을 수밖에 없나 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클레브 공작부인>의 저 노란 장미 에피소드는 내가 참 좋아하는 대목 중 하나다. 얼마 전에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누군가가 듣더니, 아니 노란 장미와 금발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서, 위에서 말한 이유를 들어 설명을 해야 했는데, 그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건 여주인공 시점에서 너무 자의적이고 과도하게 해석된 거 아니냐, 혼자 '소설 쓴' 거 아니냐(소설 속에서 쓰는 소설이라!), 그냥 우연찮게 장미를 달았고 또 우연찮게 그 장미가 노란색이었던 것일 뿐 아니냐, 고 반문하여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이 냉소적 반응의 주인공에겐 오래 연애했고 또 현재도 한참 진행중인 애인이 있다.
결국 낭만의 이념을 실현하여 현실화된 낭만을 사는 자에게 낭만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거나 불필요한 장치인 것인가. 모든 이상-이념들의 속성이란 그런 것인가. 지도원리로서, 아니면 현실화 과정에서 필요한 "사다리"로서 기능하고, 목적이 이루어지면 과감히 그리고 영구히 차버려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모든 종류의 이념에 적용되어야 할 결론 : 지나치면 오히려 본말이 전도되어 장애물로 기능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