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6일 목요일

어린이날 기념식

blogin.com · 2004-05-06

또 비다. 게다가 바람까지 매섭다. 어제도 봄비라기보다는 가을비같이 내리더니만. 그래도 어젠 이렇게 춥진 않았었는데. 이러다 내일은 눈보라가 내리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 수업을 빠질 순 없다. 늦어서도 안 된다. 오늘 수업 때 다음 수업 때 읽을 아티클들을 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 수업을 할 교수도 매 시간마다 상당한 분량의 핸드 아웃을 돌리곤 하지 않았는가. 이 모든 것들을 제때 받지 않으면, 나중에 커버할 일이 까마득하다. "안녕"하는 인사 외에 별달리 말을 해본 기억이 없는 collegue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부탁이야 할 수 있겠으나, 부탁하는 말을 어떻게 문장으로 구성해야 할지, 그리고 도움을 받은 뒤에는 어떤 식으로 감사를 표시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그래, 늦지 않는 게 상책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교수의 얼굴이 보인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다행히 아직 시작되지는 않은 것 같다. 유인물 배부가 시작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쓴 원근법에 관한 글이다. 예상했던 바다. 수학사가인 그 교수는 얼마 전까지 "원근법의 역사"를 강의했던 바 있고, 오늘의 수업은 그 과목의 연장선상이자 보충이니까. 옆에 있는 친구가 교수 앞에다 대고 또 원근법이냐고 볼멘 소리를 한다. 교수는 웃으면서 자기 전공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30분을 줄테니 읽으라고 주문한다.

누군가가 다음 수업용 복사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아직 복사물이 준비되지 않았단다. 토론이 시작된다. 교수가 두 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는 누군가가 월요일 저녁 6시 수업 이전에 꽈사로 가서 복사를 한 다음에 수업 때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복사를 해서 모두에게 우편으로 부쳐주는 것이다. 두 번째 제안은 몹시 의외였다. 수업용 복사물을 우편으로 부쳐 준다는 얘긴 들어보지 못했다. 심지어 다음 수업은 그 교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맡은 건데 말이다.

갈등이 시작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 제안은 비효율적이다. 내가 월요일 수업 시작 이전에 시간이 있으니 복사를 맡겠노라고 자원하면 된다. 한국에서도 세미나나 수업 시간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곧잘 나서곤 하지 않았던가. 이번 기회에 이미지도 좀 쇄신하고.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말하나. Je peux faire ça car je suis libre ?

머릿속에서 몇 개의 유치한 문장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사이, 결국 교수의 친절한 제안을 따르기로 결론이 난다. 교수가 주소를 적으라며 백지를 돌리기 시작한다. 아직 늦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면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볼 것 같다. 시선은 텍스트를 향해 있지만 아무 글자도 들어오지 않는다.

옆의 친구가 교수에게 질문을 한다. 종이를 쥔 손을 내 쪽으로 향한 채다. 버릇이겠거니 하고 내버려 둔 채, 그들의 Q&A를 따라가려 집중한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질문을 마치자 내 쪽으로 종이를 '탁'하는 소리가 나게 내려 놓는다. 자세히 보니 교수가 주소 적으라고 돌리고 있는 종이다. 왜 그 손짓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저번에 내가 자기 말을 못 알아듣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도 저 아이였는데.

교수가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한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두피에서 소름이 돋는 게 느껴진다. 모든 게 한탄스럽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왜 말하지 못했을까. 왜 반 년이 넘어가도록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일까. 이러면 안되는데, 수업에 집중해야지. 시험까지는 채 두 달도 남지 않았다. 더구나 기하학과 미술이 만난 대표적 사례인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은 "과학에서의 美"에 대한 연구를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내게 무척 중요한 주제가 아닌가. 그치만, 조금 아까의 내 자신은 정말 용서할 수 없다. 아무래도 난 저 아이들처럼 거리낌 없이 질문하고 토론할 수 없을 것 같다.

문이 열리더니 꽈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들어와 손에 한 가득 들고 있던 것을 '쿵'소리가 나게 내려 놓는다. 순간 주위가 밝아진다. 바로 문제의 그 복사물인 것이다. 이제 죄책감/자괴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아, 게다가, 이게 무슨 횡잰가. 그 중 하나가 지난 몇 달동안 찾아 헤맸으나 결국 손에 넣지 못했던 <아날>誌의 그 논문이 아닌가. 그래. 이 정도면 절망에 빠질 스무가지 이유 중 하나는 상쇄될 수 있을 것 같다.

도망치듯 강의실을 나선다. 두 시간 후에 있을 도미니크 르쿠르의 제자들이 발표하는 세미나에는 가지 않기로 한다. 재미있거나 내 전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의 발표는 다음 주부터 시작될 거라는 지레짐작을 핑계/위안으로 삼으면서.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관계로 가서 졸 가능성이 꽤 크다는 것, 내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쳐야 할 숙제가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핑계/위안이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숙제를 할 힘을 내려면, 저 깊고 어두운 절망에서 한 발자국은 더 나와야 할 것 같다. 에클레르 까페를 떠올린다. 지난 겨울 사촌 언니의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처음으로 맛 본 후 잊고 있다가, 스노우캣이 다이어리에다가 에클레르에 대한 향수를 적어놓은 걸 지난 일요일에 보고는 당장 나가서 사다 먹었었다. 마들렌느+홍차-> 맛+향기 -> 기억/상기의 도식이 역전되는 순간이었지. 지금은 그게 되먹임되고 있는 중이고. 단 걸 좋아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걸 보니.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린이날이었구나. "과년한" 처녀가 웬 어린이 타령이냐고? 옛말에서 "어린"은 "어리석은"이라는 뜻이었다잖는가. 그래, 오늘만큼은 내가 아무리 어리석었더라도 좀 이해하기로 하자. 뜻밖에도 저 과자 하나가 "관용"의 정신을 상기시켜주는구나. 그 정도면 어린이날 기념食으로 충분하다. 그 하나만으로도 오늘 저녁은 어린이날 기념식을 겸한 성찬이 될 것 같다. 에클레르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네가 날 좀 살려줘야겠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니 오늘, 단 하룻밤만이라도.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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