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위험과 부담을 무릅쓰고, 대신 이러한 시도의 한계--성급한 일반화, 피상적 분석, etc.--를 숙지한 채로, 일반화 논의를 밀고 나가보자. 로맨스의 상당수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서 "그들은 아이를 많이 많이 낳고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 좀 더 나간다면 셰익스피어 희극이나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기원을 둔, 소위 "로맨틱 코미디"이거나, 아니면, 두 주인공이 둘 다 죽거나 아니면 한 사람만 죽고 다른 한 사람은 남겨진 채로 불행한 여생을 보내는 걸로 끝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혹은 [폭풍의 언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장미 혹은 신파가 넘치는 멜로 드라마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쨌든 이 모든 이야기의 처음이자 끝, 나아가 본질은, 두 영혼의 조합 혹은 합일 여부에 있었을 터다. 나머지는, 매우 거칠게 말해서, 부차적 요소나 극적인 장치에 불과했고.
이 구도가 복잡해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아마도, 이른바 "근대적 주체"가 등장하고, 근대 산업화 및 도시화 이후로 이 주체가 더욱더 개인화되고 분자화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두 영혼의 합일 여부에 앞 각 영혼의 개별성과 특이성이 부각되고, 이들 앞에는 이제 "주체"로 거듭나고 자아(정체성)을 실현해야 할 과제가 놓이게 된다. "또 다른 반쪽"이나 "영혼의 쌍둥이", 즉 타자와의 조화나 합일은 더 이상 당위이거나 목표가 아니고, 기껏해야 이 과제를 실현키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러면서, 역으로, 타자와의 조화나 합일의 당위성을 지적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일이 지배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현대식 가족 및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다. 이제, (악인을 제외한)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안정과 평화와 행복을 찾는 동시에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일정하고 규격화된 메세지-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신성하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등등-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2004년작인 [500일의 썸머]<500>까지만 해도 그랬다. 3인칭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는 "탐이 그 동안의 연애사에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우연들에 전 우주적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하고 끝을 맺으려다 "그러나..."를 덧붙인다. 탐이 또 다시, 저 보편적이고 냉엄한 진리를 거스르고,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소한 우연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 내레이터는 말을 잇지 못하고, 탐은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보낸다. 관객에게 자신이 받은 큐피드/우연의 여신의 가호를 관객에게 전수라도 할 기세다. 이렇듯, "사람은 결국 혼자다. 혼자인 것 맞는데..."하고 말꼬리를 흘리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덧붙이고, 거기에 뭔가 더불어 사는 삶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 이것이 로맨스의 논리 구조였다. 그 중 어떤 논증들은 진부하거나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어떤 결론들은 기만적이기까지 했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2010년대에 나온 로맨스들은 이러한 전통 서사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인다. 특히, [블루 발렌타인], [벨빌 도쿄], [비기너스] 등, 2010년을 전후로 해서 나온 30대 이성애 커플들의 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그렇다.
[블루 발렌타인]은, 아이, 강아지, 일 등등에 치여 살던 30대 부부가 마침내 파경을 맞게 되는 약 48시간의 일과가 이야기의 주축이다. 두 사람 모두 가족에 관한 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남편은 엄마 없이 자랐고, 아내는 애정이 식은 부모(아빠는 가부장) 밑에서 자랐다. 처음에 그들이 꾸린 가정은 이에 대한 보상 기제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48시간 동안, 몇몇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이 벌어지고, 이 갈등은 그때까지 쌓인 앙금을 표면화하여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이에겐 부모가 필요하다"는 남편에게 부인은 "원수지간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만큼 아이에게 비극적인 건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뒤돌아 혼자 걸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춘다.
이 영화에서는 첫 만남에서 결혼까지의 과거, 그리고 맞벌이 부부로 사는 현재, 이 두 시간대가 별다른 구분 없이 맞물린 채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라고는 하지만 그 시간차는 겨우 5-6년 정도.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들의 외모상의 변화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근과거"의 재현은 배우를 바꾸거나 배우에게 코스튬을 입히거나 시대를 반영한 세트를 꾸미는 사극/역사물과는 다른 테크닉을 요한다. 이를테면, 딱히 플래시백임을 보여주는 장치 없이 과거 시퀀스들이 현재의 곳곳에 랜덤하게 끼어들면, 보는 사람은 뭐가 현재고 뭐가 과거인지 혼동하게 되고, 플롯을 시간 순서대로 그리고/또는 인과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애를 먹게 될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경우가 그러했고, 2011년경 나온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그러했다 (후자는 로맨스와 거리가 멀지만. 멀어도 한참 멀지만. 그런데, 또, 그렇게 먼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본격 첩보물 영화에도 로맨스 코드는 당연히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별다른 장치 없이도 그런 혼란의 소지를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 젊고, 첫 만남에 설레고, 임신이나 결혼이라는 변화가 마냥 두렵기만 한 20대의 그들과, 30대로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강아지를 키우고 일터에 나가는 등등의 일상에 치인 현재의 그들, 이 둘 사이의 간극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테제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벨빌 도쿄]의 주인공은 영화평론가와 영화관 프로그래머인 파리지엥 부부. "벨빌 도쿄"라는 제목은, 극 중 남편이 도쿄 영화제 출장이라는 핑계를 대고 파리에 사는 애인의 집에 며칠 묶던 중에 동양 사람들 (주로 중국인들)이 많은 파리 북동쪽 벨빌의 한 가게에 들어가 아내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신 중인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내는 황당해 하다가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돌아온다. 아내는 또 괴로워하다가 또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남편이 (생각보다 훨씬) 이중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도쿄에 있는 줄 알았던 남편을 파리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 뒤를 쫓다가 애인에 집까지 당도...) 먼저 스스로 떠난다 . 이 영화 역시 주인공이 혼자 뒤돌아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비기너스]는 30대 후반의 미혼 남성인 주인공의 시점을 취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웃음을 잃었다가 파티에서 만난 발랄한 프랑스 아가씨를 만나 애도를 끝낸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두 영화는 다르다 하겠다. 우선, 굳이 하위장르를 따져 세분하자면, 내가 개인적으로 "연애입문 및 성장담"이라 부르는 장르(플로베르의 [감성교육]과 발자크의 [골짜기 백합]에서부터 트뤼포의 두아넬 연작이 이에 속한다. 베르테르도?)에 속한다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희극과 비극의 이분법 구도에서는 희극에 가깝다. 감독도 일러스트레이터 출신이고, 또 주인공도 로스앤젤레스에서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인 만큼, 발랄한 일러스트 컷도 많고 아기자기한 데코도 많고. 그럼에도 영화는 별로 밝지 않다. 주인공이 어둡기 때문이다. 단지 부친상을 당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의 현재를 장식하는 주변 인물들이 밝을수록, 주인공의 회상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70이 넘어 커밍아웃을 하고 젊은 게이들과 정력적인 정치 및 사교 활동을 펼칠수록, 그의 어두운 면모는 더더욱 부각되며, 이는 프랑스 아가씨가 짐을 싸들고 집으로 같이 살러 왔을 때 이 아가씨가 지닌 어둠의 포스와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위의 영화들이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셋 다 열린 결말이라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결말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일 게고, 관객은 자신의 인생관이나 연애관이나 현재의 심리 상태에 비추어 결말에 대해 각자 다른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 [블루 발렌타인]과 [도쿄 벨빌]의 경우, 영화가 이혼 법정에서 끝나지 않은 이상, '언해피'하지는 않은 엔딩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 주인공이 뒤돌아서는 마지막 장면들은, 오, 쓸쓸하기 짝이 없다. [비기너스] 같은 경우, 아가씨는 떠나고 주인공은 아가씨를 찾아 뉴욕까지 가서 결국 두 사람이 재상봉하고 있는 만큼, 남녀 주인공 둘이 벽을 깨고 서로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행복한 미래를 암시하는 여지를 비교적 충분히 남겨놓고 있는데, 그럼에도, 관점의 주관성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열린 결말"은, 이 결말이야말로, 그다지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 시인의 명제는 유효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섬에 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이 그러한 보편 정서를 반영, 자기애 가득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유아론적인 인물이 점차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아 가고 마침내 결말에 가서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에 당도하는 과정을 그려왔다. 그런데 위의 세 영화들은 "사람들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 첫 명제를 반복하고 거기에 커다란 마침표를 찍는 데에 그친다. 관계에 대해 희망이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회의론을 재고할 최소한의 계기조차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섬"에 가고픈 열망이 집단의식 차원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아니면 영화가 재현하거나 생산하려는 가족 및 사랑 이데올로기가 변했거나, 둘 중 하나이거나 아님 둘 다이거나.
...라는 것이 2011년 가을 무렵 이 글을 시작하면서 했던 생각이었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비슷한 주제--30대 이성애 커플의 삶과 사랑--의 영화들을 보며 "어떤 경향"을 읽어내려는 의도에서. 이런 성격의 글이 시기를 놓치면 아무 소용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냥 버리지는 못하고 어쩌지도 못하고 그렇게 방치한 채로 몇 달을 보내던 중, 아니, 보내는 내내, 그 사이에 나온 다른 영화들을 보며, 관계 불가능성 가설을 검증하고 보완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이 가설을 철회하거나 대대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관계의 원천적 불가능성보다는 관계의 재개념화를 포착했어야 했다.
...라는 것이 2012년 초, 정확히 이맘 때, 처음에 시작했던 글을 끝맺어 보려 다시 시작하면서 했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무려 5년이 지났다. 하필 30대의 마지막과 겹쳐 버린 그 5년이라는 세월 동안, 관계에 대한 나의 입장은 극단적 회의론과 대책없고 위험천만한 낭만주의를 정신없이 오갔고, 그렇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끝에, 결국에는 다시, 원천적 불가능론으로 복귀하기에 이르렀다. 무릎 위에서 재롱 부리는 손주를 같이 바라보고, 밤에 늦게 들어오면 얄밉기는 해도 밥은 먹여주고, 밸런타인에는 초콜릿도 주고, 전기가 나가면 퓨즈를 갈아줄 누군가와 더불어 예순 네살을 맞이(Beatles, "When I'm Sixty-Four" : 나의 결혼관을 바꾸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여전히 최고의 청혼가라 생각하는 노래)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생각하니 다소 슬프긴 하지만, 이까짓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기분 쯤이야, 진리에 바친 삶을 위해서라면야 (vitam imprendere v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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