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6

blogin.com · 2004-10-24

<2046>을 보다...


1.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건

1.1 관련 기사나 비평들은 고사하고 시놉시스도 읽지 않은 채로 영화를 봤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김모' target='_son'>http://www.film2.co.kr/movi ... .asp?mkey=34260>김모 기자(^^)가 <필름2.0>에 쓴 것 을 비롯한 몇 개의 아티클들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적어도 넷 이상의) 스토리 라인들을 대강이나마 정리할 수 있었다.

1.2 왕가위의 스타일에 익숙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 그의 영화는 <중경삼림>, <타락천사>, <화양연화>가 전부다. 그것들 말고도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하나 하나, 꼼꼼하게 봤어야 했다. 내가 <아비정전>에서 장만옥이 맡았던 역의 이름이 "수리첸"이었고 그 이름이 이번 영화에서도 동일하게 쓰였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겠는가.

1.3 오랜만에 "정상적인" 관람 환경에서 영화를 보게 됐다는 사실에 들뜬 나머지 영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4 불어 자막을 해독하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5 페이 왕(내겐 왕정문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의 미모 때문이다. 병원에 들어갔다는 얘길 들을 때 또 안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녀가 2046 열차 안에서 펑키 스타일의 머리와 복장을 한 안드로이드가 되어 우주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별과 별 사이를 떠다니고 있는 사슴 같은 눈빛과 몸짓을 보여줄 때 난 정신을 잃을 뻔했다.

1.6 엔딩 크레딧의 "LG" 마크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영화가 남긴 잔상의 한 10%가 날아갔다. 그 마크가 조금만 덜 선명하고 조금만 덜 길게 나왔더라면 이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이나마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매트릭스 리로리드>팀이 제작했다는 CG는 안들어가느니만 못했다고 생각한다. 세트로 만든 열차만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첫 화면에선 그래도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리며 즐거워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혹시 <블레이드 러너> 패러디/오마주? 그렇게 생각하니깐 LG는 또 코카콜라랑 오버랩되네).

1.7 감독의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아님 내가 그의 심중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머리가 나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든가. 홍콩 반환 50주년이 되는 해라는 시간과 <화양연화>에서 두 주인공이 만난 방이라는 공간에서 출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에서 좀 너무 멀리 나갔거나 아니면 가지를 너무 많이 친 것 같다. 보는 도중에 '이거 언제 끝나나' 하는 생각과 '이렇게 해놓고 어떻게 끝내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스치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다.

2. 그래도 이 영화가 나쁘지 않았다면, 그건

2.1 호텔 옥상 때문이다. <여고괴담, 그 두 번째 이야기 : 메멘토 모리>의 학교 옥상이 생각났다.

2.2 왕가위 특유의 수려한 미장센들 때문이다. 하나씩 잘라서 스틸 컷으로 놓고 봐도 그대로 그림이 될 만한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난 그가 카메라 가지고 노는 방식도 좋아한다.

2.3 음악 때문이다. 살리에리에게 천형과도 같았던 "들을 수 있는 귀"는 왕가위에게로 와서 모짜르트의 재능 부럽지 않은 축복이 되었다.

2.4 "기억"을, 그 "기억"이란 것의 속성에 가장 잘 맞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프랑스 언론의 프루스트를 운운한 영화평 기사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기억이나 기억의 재현물에 깔쌈하게 정리된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감독이나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관객이나 서로에게 보다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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