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1일 월요일

인생 최고 흑역사와 후일담

- 이전 포스트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인생 최고 흑역사와 후일담 에 이어진 글.
- 이번에도 아스테릭스(*) 각주는 사후 추가.


4 JUIL. 2019 15:39

인생 최고의 흑역사를 기록하다.

5일 전에 쓰던 그 발표문, 결국 끝내지 못했다. 게다가 발표마저도 펑크를 내고서 연구실로 와서 앉은 지금. 처참하지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비관적이지는 않다.

원인? 시간은 넉넉했다. 그렇지만 이래저래 또 집중을 하지 못한 채로 몇 주를 흘려 보냈다. 여기저기 발표한다고 광고는 다 해놓고. 당장 8월과 9월 발표*가 예정되어 있는데 그건 다 어쩌려고? 다른 발표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건 다 해도 이것만큼은 놓치면 안 되고 제일 잘해야 했거늘.

비극적인 결말을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 지난 목요일, 그러니까 1주일 전. 23일 발표문 마감을 넘긴 후 그래도 3~4일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목요일은 이모 생일이었다. 그전에, 이번에도 내 쪽에서 먼저 자진해서 제안을 해놓고서 바로, 후회는 아니고 뭐랄까, 불길한 예감 같은 게 있었다. 이상적으로라면, 아니 예상했고 충분히 또 가능한 각본대로라면, 지난 목요일까지는 발표문에 이어 번역 발제문까지 다 마쳐놓은 상태에서 홀가분하게 저녁을 보내고 파티를 즐길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무리하게 일정을 잡아 놓으면 그 일정에 맞추려 스스로에 동기를 부여하기보다는 일은 일대로 못하고 신의는 신의대로 저버리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하지 않은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으면서도 그리고 나중에 이내 후회를 했으면서도 취소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거대하고 중요한 일을 취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후로 이어진 내 행동 하나 하나가 오늘의 이 비극적 결과에 대한 복선이요 그 결과로 이어지도록 한 계기로 작용했다. 지난 목요일까지는 그 전날까지 밤을 새고 매진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금요일 내내 멍하니 있다 오후가 되어서야 목요일까지 냈어야 할 발제문을 완성해서 보내고, 주말에는 넋 놓고 <마농의 샘>과 남북미 정상회담을 지켜 보았고, 중간중간에는 단체 대화방에서 누군가의 이름과 메세지를 보고는 착잡한 기분과 회한과 망상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한 것은 아마 이번 월요일이었을 것이다. 그냥 지난 목요일 미완성본으로라도 보냈더라면? 그보다 이번 학회에서 아예 흔적을 지웠으니 그게 더 낫다는 생각도 드나... 그럴 거면 미리 못하겠다 하든지! 어제 메밀을 먹고서 우황청심원에 항히스타민제에 온갖 약을 먹어대는 소동을 벌인 것은 또 어떤가. 네가 어제 저녁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존 것이 과연 메밀 때문이기만 할까?

이 일은 내 커리어 상의 중대한 오점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40대가 훌쩍 넘었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내 커리어. 신의는 신의대로 못 지키고 실력은 실력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실력이란 게 있다면! 어쩌려는 건가? 어쩌자는 건가? 정말이지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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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다가 겨우 생각났다. ㄱ 재단에서의 발표였다. 이것도 준비를 많이 못한 상태에서 겨우 끝마쳤으나... 발표장까지 무사히 갔던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자위하고 말 정도로 내 상태는 심각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지금. 당시 미완성으로 남긴 발표문 앞에 앉았다. 그렇게 대형사고를 친 후, 올해 안으로 완성해서 학회지에 투고하겠다고 공언하고 또 스스로도 다짐을 해두었는데, 학회지 마감기한이 바로 오늘 자정인 것이다. 정확하게는 어제까지였으나 오늘까지는 가능하다는 답변을 오늘 아침에 편집국으로부터 받았다. 아무래도 무리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에 마무리하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을 안다. 어제까지 끝냈으면 좋았겠고, 원래는 토요일부터 이틀 꼬박 투자해서 마무리할 계획이었으며, 그 계획은 반드시 성사되어야 했으나, 또 4개월 전과 비슷하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주말을 허망하게 보내버렸다. 4개월 전에 남북미 정상의 만남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조국 이슈가 있었고, 누군가는 또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다 오늘은 또 부모님 결혼기념일. 아침에 안될 줄 알면서 저녁 외식 제안을 했으나 정오를 향해 가는 지금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예약을 하고 두분만 가십사 말씀드린 참이다. 그래서 이곳 공부방 근처의 한 곳을 추천해 드렸더니 엄마가 됐다고, 동네에 생각해 둔 곳이 있다고, 어딘지는 비밀이라고 하신다.

... 그럼 이제 그건 됐고 이제 꼭 12시간 남았다. 세상이여, 12시간 후에 다시 만나세.

... 그런데 어디까지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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