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20일 화요일

서점에서 눈이 부시다

blogin.com · 2004-04-20


갈리마르 출판사의 상상 총서(collection l'Imaginaire)는 타이포그라픽 아트와 북 디자인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예전에는 이 책들이 이 정도로 아름다운 줄은 몰랐었다. 이 책들의 디자인 면에서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어제 서점에 가서였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다가 계산대로 향하려던 찰나, 갑자기 눈이 부셨다. 눈을 부비고 자세히 봤다. 한 널찍한 진열대 위에 눈이 쌓인 듯했다. 하나같이 새하얀 바탕 위에 오로지 저자, 책 제목, 출판사 및 총서명만을 새긴 표지의 책들을 그렇게 모아두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단순성의 미학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을 정도로.

사실 그것들이 그저 단순한 데서 그쳤다면 날 그렇게까지 사로잡지는 못했으리라. 내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타이포그라피의 기교 때문이었다. 보르헤스의 <알레프> 정도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으나, 그냥 넘어가면 아쉬워할 만한 디자인들도 상당수 된다. '눈'이라는 글자를 통해 눈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바타이유의 <눈의 역사>도 그 중 하나겠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꾸미고 있는 것은 장작 나무들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천재의 일기> 표지에서는 달리의 수염이나 사물이나 사태를 뒤틀고 꼬는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그림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 순). 이렇게 書와 畵가 조화를 이루는 경우도 드물 것 같다.

문자는 대상을 드러냄에서만큼은 그림과 같은 다른 재현 수단보다 더 큰 한계를 갖는다. 칼리그람이나 타이포그라피는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문자의 시도를 잘 보여준다. 어쨌든, 그러한 시도의 효과는 어느 정도 입증된 셈이다. 나 역시 거기에 넘어가서 한 권을 집고야 말았으니.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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