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4/2004, 일요일
덧없는, 더없는 : 사빈느 바이스의 파리 PM 08:55 (서울 5.5˚C)
파리는 확실히 "사진발을 잘 받는" 도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면 뭐든지 카메라를 들이대어 넣고픈 욕망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을 일일 정도로. 그런데, 그런만큼, 파리를 사진으로 담아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 에펠탑이나 개선문이나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한 몇몇 관광 "증명" 사진이 파리의 "증명" 사진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외의 다른 것들은 파리를 대표/재현한다고 하기 어렵다. 그것들을 찍은 사진--골목길이나 지하철이나 기타 등등--의 경우, "이거 파리에서 찍은 거야"라는 부연 설명이 없는 한, 파리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세느 강변 일대의 헌책 노점상들을 사진으로 담아냈을 경우, 보는 사람에게 "파리 세느 강변에는 주말마다 이런 노점상들이 줄을 지어 선다"는 "전제"를 동의시켜야 비로소 그 사진은 파리의 사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상징"들은, 모든 종류의 재현물들이 그러하듯이, 그것들이 품고 있는/드러내려고 하는 수많은 다양한 요소들을 전부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사실, 뭐, 그러한 재현의 한계야, 굳이 그 재현의 대상이 파리여서가 아니라,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아니, 인간의 "봄"--카메라 렌즈 역시 인간의 눈을 모방한, 인간의 눈을 연장한 도구가 아니더냐--이라는 것 자체가 가진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다.
그런데 어떤 사진들에는, 인간의 "봄", 재현, 그리고 대상 간의 관계를 비트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하다. 흔히 사람들은, 파리가 기념비적 건물로 채워진 박물관 같은 도시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진가로 로베르 드와노와 으젠느 앗제를 든다. 나 역시, 드와노가 "파리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앗제가 "파리에도, 지배 계층의 철저한 계획과 노동 착취로 만들어진,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죽은 '기념물'뿐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로 살아가는 터전, 사람들이 살아 숨쉬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동서(공간)고금(시간)을 초월해서 그 동일성과 가치를 인정받는--이는 "고전"의 기준이기도 하고 "문화 유산"의 기준이기도 하다-- 것들이 아닌,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기는 고사하고 그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그래서 인간의 눈에 들어오기 힘들거나, 들어왔다 해도, 아주 희미한,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밖에는 지속되지 못하는 잔상으로 남는 것이 고작인 것들을, 용케도 잡아냈다.
파리에 살면서 나는, 드와노와 앗제가 "퍼스펙티브"를 그렇게 미분화/정교화할 수 있었던 것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들이 파리에 있었고 그들의 피사체가 파리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파리지엥/파리지엔느들은 뭐가 그리들 바쁜지 늘 무서운 속도로 걷는다. 그런 한편으로, 점심 시간, 퇴근 시간, 휴일 같은 때 까페나 공원은 늘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까페나 공원에서 사람들은 거리를 지나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들의 "관찰"은 열렬한 호기심이나 탐구욕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생각없이 틀어놓은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것과 비슷한, "덧없는" 눈길에 가깝다. 덧없는 것들에 대한 덧없는 눈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의 가장 무해한,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정당한 적용이다. 드와노와 앗제의 시선은 그러한 관찰자 시점을 아주 정확하게 반영한다.
바이스의 "파리"를 본 것은, 오늘, 예의 일요일과 다름 없이,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랜만에 햇빛 쏟아지는 거리를 정처없이 헤매던 중에 마주친, 한 가게 앞에서였다. 무심히 이런 저런 엽서들에 눈길을 주고 있던 차에, 한 사진("2CV A PARIS", 1957)에 시선이 내리꽂혔다. 빗방울이 맺힌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한 남자. 우산을 쓴 채로 뛰어가고 있는. 뒤로는, 사진의 제목을 장식하기도 한, 2CV가 보인다. 저 "순간"을 어떻게 포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같은 순간에 작가가 까페에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리고 저 흐릿한 풍경을 저토록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역시 흐릿한 "촬영 환경"--비맺힌 유리창, 어두운 실내 등등--에 있었던 덕분이리라. 그런 면에서 사빈느 바이스의 이 사진은, 촛점이 또렷하게 박힌 드와노의 사진보다 훨씬, 그리고 "빛이 많이 들어간" 앗제의 사진보다도 더, 이 흐릿하고 덧없는 도시를 정확히 재현한다 (참고로 6개월 지내본 바에 의하면, 파리에는 볕이 드는 날보다 들지 않는 날이 훠얼~씬 많다).
또 다른 사진 하나("Paris", 1953). 위 사진의 "양각화"라고나 할까. 지는 해를 향해 뛰는 여자. 역시 빛보다 어둠이 더 진하다. 덧없다. 그렇지만 역시 덧없는 것에 대한 덧없는, 그래서 더없이 정확한 시선이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이것이 파리다!" 하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메모> 글을 좀더 다듬으려면 다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 사르트르의 "까페 인간", 보들레르의 "산책자", 사진 미학(바르트, 손탁), 사진 이론, 사진사, 포토 저널리즘(사빈느 바이스에 대해 좀더 알기 위해), 자동차 2CV, etc.
옛글을 퍼다나르고 붙이는 기분, 꽤나 묘하다. 생각 같아서는, 미진하기 짝이 없는 글 말미에 붙여놓은 궁색한 변명일랑 싹 빼버리고는, 오늘을 미뤄둔 숙제하는 날로 잡은 셈치고 이것저것 기워넣고 싶으나, 또 한 번 미뤄두기로 한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어설프면 어설픈대로. 나중에 보면서 낄낄댈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물론, 막상 그날이 오면, 얼굴이 화끈거릴지도 모르겠으나.
또 하나. 앞서 올린 사진의 "양각화"라고 표현했던 작품은 몇 가지 이유에서 업로드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 작품을 우연찮게 재발견하면서 생각이 달라진 것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업로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몇 시간을 고군분투했건만. 역시 그림판이나 애크로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포토샵이 이렇게 미치도록 그리웠던 적은 없었고, 하다못해 페인트샵마저 아쉽게 느껴졌다. 이 역시 다음 기회에.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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