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20일 화요일

익숙함, 적응되지 않은

blogin.com · 2004-04-20

며칠 전 동네 앞에 잠깐 나갔을 때,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문앞을 나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마치 "우리 동네"처럼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졌거든. 내가 "이곳"에 살고 있고 있구나, 또 이곳에 살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 "나"(였)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어. 예전까지는 집밖에만 나서면 전시회에 온 기분이었거든. 분명히 아주 오래 전에 꿈에 그리던 풍경들이긴 한데, 정작 그것들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질 땐 아주 비참하더라구. 꿈속에서만 보던 때보다 훨씬 더. 그림들이 선명해질수록 그 안에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니까. 그런데, 며칠 전 그때, 그 풍경들이 처음으로 익숙하게 느껴졌던 거야. 그것도, 사진에서 보아오던 파리보다는, 내가 들어가도 될 만한, 담배 사러 나온 후줄근한 동네 총각이나 찬거리 사러 나와 이웃들과 수다떠는 아줌마가 등장하는, "우리 동네"에 가까운 그림으로 말이야.

오늘도 그랬어, 그 동네에서 좀 멀리 벗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온갖 것들이 다 정겹게 느껴지다니. 일주일만에 밖에 나간 탓도 있겠지. 비록 오늘도 역시 도서관에 들어가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대체 이 기이한 느낌의 정체는 뭘까? 이방인을 은근하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소외시키는 이 나라에서 "우리 동네"의 향취를 다 느끼다니. 

그렇다고 내가 여기에 "적응"을 했다고 하긴 힘들어. 물론, 이곳에 온지 이제 곧 7개월이 될 테니, 적응할 때도 되긴 했지. 하지만 7개월은 나 같은 인간이 이국에서 적응하기에 결코 충분한 시간이 아니야. 난 한국에서조차 부적응아였고, 그래서 엄청나게 고생했고 또 여러 사람 고생시켰잖아. 물건 사러 가는 일조차 두려운 건 여전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늘 노심초사하고.

하루종일 곰곰이 생각하다가,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에 깨달았어, 사실은 익숙해진 게 아니라 나태해진 거라는 사실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거리의 풍경을 한가로이 감상하는 일은 내게 해당되지 않는 사치였는데. 사실은 동네를 산책할 시간에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래도 따라갈까 말까인데.

이곳에 와서 받은 가장 큰 철학적 가르침 중 하나가 나태함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경계야. 바슐라르가 "일상적 인식"을 공격했던 이유도, 그것이 "과학적 인식"에 비해 모자라거나 열등해서가 아니라 가장 얻기 쉬운 일상에서의 경험에 안주하고 자기 변화에의 노력을 게을리한다는 점에서였지. 덕분에 거의 교조적/독단적으로까지 치달았던 내 사회구성주의적 입장도 꽤 많이 치료됐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배움을 내 삶에 연결시키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던 거지, 철학도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이젠 정말 일어나야겠어. 그리고 움직여야지. 이 동네에 더 정들기 전에.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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