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렝 레네(Alain Resnais) 감독의 1968년작 를 2004년에 본다는 것은 제법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웬갖 최첨단 기술을 앞세운 특수 효과와 웬만한 일상적 경험과 보통의 상상력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는 스토리로 무장한 영화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져버린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아무런 장식이나 효과도 가미되지 않은 건조한 화면들--심지어 에 등장했던 조악한 시간 여행용 가속 장치같은 것조차 등장하지 않는다--을 통해 마주 대하기란, 이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분명 고문일 것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클로드 리데(Claude Ridder)는 가슴에 총을 쏘는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다. 퇴원하려는 그 앞에 낯선 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은 클로드를 크레스펠(Crespel)이라는,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밀 연구소로 데려간다. 크레스펠에서는 "시간"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클로드의 동의를 구한 후 그의 전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1분의 순간으로 "되돌려" 보낸다. 1분 후에는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피실험자를 안심시키면서. 그런데 실험은 순탄치 않게 전개된다. 클로드가 목표했던 때--클로드가 연인 카트린과 바닷가에서 함께 했던 순간--에 도달하자마자, 시간은 클로드를 그 이전과 이후의 여러 다른 순간들로 데려간다.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클로드와 카트린이 처음 만난 자리, 카트린이 죽은 글래스고의 한 호텔,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던 세느 강의 다리나 파리의 거리, 카트린을 잃고 방황하는 클로드가 "시간이 참 안 간다"며 푸념한채 앉아 있는 사무실... 실험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실험실 밖으로 나온 과학자들은 가슴에 총을 맞은 클로드를 발견한다.
나 역시 이 시대를 겨우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관객 중 한 명에 불과한지라 이 영화를 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지루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문법을 이해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내 독해력 및 불어 실력이 부족했음을 십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이 영화가 수십 년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문법이 낯설다는 사실을 부인킨 힘들 것 같다. 헐리웃식의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객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듯한 반복이 무자비하게 자행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클로드와 카트린의 바닷가에서의 즐거웠던 한 때를 담은 컷은 열댓번 정도 반복된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난해한 문법이 "판타지"를 위한 가장 탁월한 장치가 되고, 이 영화를 진정한 판타지로 만든다. 사실 판타지의 진정성을 말한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다. "진정한 판타지"는 형용 모순일 것이다. "진정성(authenticity)"을, 어떤 종류든 기존의 "정격"이나 "규범"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판가름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판타지"를, 아주 미흡하게나마,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기존의 모든 것을 넘어서거나 뒤섞어나 갈아엎는 장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이 영화는 그 두 가지 조건을 아주 잘 만족하는 동시에 그 조건들을 뛰어넘는다. "판타지"를 단순히 "장르적"으로가 아니라 좀더 넓고도 깊은 의미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제아무리 "판타스틱"한 아이디어도 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탄력적 시간"이라는 개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과거를 (내 의지대로) 떠올리거나 과거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무의식적으로) 떠오를 때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잔뜩 뭉뚱그려지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는 곳에서 판타지가 생성된다. 이렇게 볼 때(라기보다는 아주 심하게 비약하자면), "시간 여행"의 모티브는 가장 태고적이고 원시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에서 시간 여행에 대한 반론으로서 가장 흔하게 제시되는 것이 "모친 살해 패러독스"라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시간 여행 장치로 쓰인 기구가 자궁(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이 갖는 형태와 질감을 연상하면 된다)을 닮아 있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 같다.
흠. 이렇게 얘기해 놓고 나니 이나 팬들에게 면박을 당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으나. 나는 그보다는 살짝 어설픈, 즉 CG를 쓰더라도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그렇지만, 아니 그래서 더더욱 "판타스틱"한 나 가 좋단 말이지. 뭐 거기에 내 반미 정서가 개입돼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래도 는 무척 보고 싶단 말이지.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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