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30일 금요일

2004년, 프랑스 인식론의 해

blogin.com · 2004-07-30

가스통 바슐라르는 1884년에 태어났다. 올해로 120년이다.
조르주 캉길렘은 1904년에 태어났다. 올해로 100년이다.
미셸 푸코는 1984년에 죽었다. 올해로 20년이다.



지도교수님이 "그래, 그 동안 뭘 배웠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프랑스 인식론이 어떤 점에서 영미 과학사/과학철학과 다른지에 대해 배웠노라고 답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래, 어떻게 다르다니?"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나는 숨돌릴 틈도 없이 잽싸게 말했다. "그게요, 수업 시간마다 다들 제각각으로 얘기해서 말이지요."

아마도 이제는 보다 제대로 된 답변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 답변에는 아마도 이런 말들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 역사주의, 이성(중심)주의 그리고/또는 합리주의, 과학주의,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의 변증법. 이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 도미니크 르쿠르가 자신의 석사 논문을 위해 창안한 이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역사적 인식론(l'épistémologie historique)"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통"을 세운 이는 단연 가스통 바슐라르다. 나는 그에 관해 말함에 있어 과학사가냐 과학철학자냐 인식론자냐 하는 "직업"상의 구별은 온당치 못하거나 적어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과학에 관해, 그리고 좀더 넓게는 인간의 인식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느냐다. 바슐라르가 그의 동시대 과학이 갖는 인식론적 의미에 대한 성찰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인식론적 장애물"이라고 표현했던 그 이전 시대 과학의 발굴에 "역사가적 자세"로 몰두했던 것도 오로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는 사실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과학사는 과학을 둘러싼 담론들의 총체가 변화해 온 궤적을 일컫는다. 그 궤적은 결코 단선적이지도, 일방향적이지도 않다. 인류의 다른 정신적/물질적 활동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호흡한다. 그런 의미에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장이"라는 뉴턴의 말은 옳았다. 그 말은 천재의 겸손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사실인 것이다. 이 때의 "거인"이 뉴턴 이전의 다른 "천재"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이해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는 바슐라르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인식론자"들의 과학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비과학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들의 논의는 일견 과학/비과학 구획에 대한 포퍼의 기획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포퍼가 프로이트나 맑스를 너무나도 간단하게 "명단"에서 제외해 버린 반면에, 바슐라르는 "일상적 인식"이 "과학적 인식"과 이루는 긴장에 주목하고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결국에는 의도와는 달리 인간 정신의 가장 내밀하고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그 "장애물들"을 복원하는/복권시키는 "일"을 내고 말았다. 그것들이야말로 과학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긴장 상태에 있게 하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수정을 가하게 하는, 그리하여 쉼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임이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그의 직속 제자인 조르주 캉길렘에게, 그리고 그 이후의 미셸 푸코에까지 이어진다. 이들에게 "병리적인 것"이나 "광기"는 "정상적인 것"이나 "정상성"에 준하는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먼지가 수북히 쌓인 사고를 뒤져가면서까지 공인된 과학사 속에 묻혀 있던 사료들을 발굴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이유도 없었으리라.



내가 그들로부터 배운, 아니 이미 다 배웠다기보다는 앞으로 한참은 더 배워야 할, 그런 태도는, 멈추지 않는 "탐구"의 정신이다. "'나'란 단지 '공부하다'라는 동사의 주어에 다름 아니다"라는 바슐라르의 말은 상아탑 속에 안주하는, 안락 의자에 파묻힌 모든 철학, 아니 모든 학을 경계하라는 말로 읽혀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인식론은 자신의 선조인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를 계승하는 동시에 넘어선다. 프랑스 인식론자들의 "과학"에 대한 경이/애착은 데카르트가 당대의 과학과 수학에 대해 보여줬던 그것과 무척 닮아 있다. "합리성", "이성"에 대한 태도도 엇비슷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나'는 더 이상 '생각하는 나'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변화' 혹은 '생성'의 이유들을 찾아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 그것이 '공부하는 나'다.


※ 미뤄뒀던 숙제를 이렇게 부족하게나마
  완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France Culture 에서
 바슐라르 탄생 120주년을 맞아 마련한
 특집' target='_son'>http://www.radiofrance.fr/c ... resentation.php>특집 방송 의 힘이 컸다.
8월 한 달 동안은
 그로 인하여 행복할 것 같다.
이 방송들을 컴으로 녹음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 혹시 ram이나 rm으로 틀어주는
 라디오 방송 녹음하는 방법을 아시는 분 계세요?
가르쳐 주시면... 안 잡아먹을 뿐 아니라
선물까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박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