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기원은 모든 사유하는 인간이 끊임없이 천착해 온 문제다. 별들로 가득한 우주를 바라보면서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묻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리 푸앵카레가 『우주생성 가설에 관한 강의』의 서두에 한 말입니다. 도시에서 자란 제게 별이 빛나는 밤을 직접 목격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질문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중학생 시절, 과학 대중화 서적과 잡지들을 통해 천체물리학과 우주론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이성이 제기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이성 자신 힘만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는 사실, 그리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오직 사유를 통해 무한한 공간에 접근한다는 사실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론 천체물리학자의 꿈을 안고서 자연과학대학 자연과학부에 진학, 전공으로 물리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전공을 택한 후 정작 제 관심을 끈 것은 전공과목보다는 교양수업에서 접한 인문 · 사회과학이었습니다. 특히 여성학과 철학 수업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전회를 겪었습니다. 근원적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그 문제의 의미, 타당성, 가치, 그리고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문제 자체, 나아가 인간의 지적 사유 전반에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철학을 부전공으로 택한 뒤,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고자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공부한 철학과 대학원은, 당시 한국 서양철학 연구의 전반적인 풍토가 그러했듯이, 영미 분석철학 전통이 강했고, 대학원 수업과 세미나를 통해 분석철학 특유의 논증적 스타일을 익히면서 철학도로서 더할 나위 없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석사논문 “수학의 적용과 그 존재론적 함축”은, 수학의 수학 외적인 것에 대한 적용을 하나의 수학철학의 문제로서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학적 대상들의 존재론적 위치를 가늠하고자 한 하나의 시론으로, 당시까지 제가 거친 지적 여정과 훈련을 종합한 결과물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석사과정 내내 저는 다른 방법론에 대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가스통 바슐라르, 조르주 캉기엠, 미셸 푸코라는 세 이름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과학철학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과학과 지속적인 대화를 추구하고 또 그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참조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과학철학은 구체적인 과학적 사실들과 과학사 전반의 흐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흔히 “역사적 인식론”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독특한 전통을 보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저는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고, 파리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연구 주제를 찾던 중에 앙리 푸앵카레라는 이름과 조우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릴 적부터 고민해 온 바로 그 문제, 즉 우주의 기원에 관한 강의를 이 위대한 수학자가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박사논문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연구된 바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이 강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한편으로는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고전우주론을, 다른 한편으로는 푸앵카레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푸앵카레 연구와 우주론의 역사 및 철학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파리라는 도시의 지역적 이점, 그리고 제가 속한 과학철학 및 과학사 과정 및 연구소의 특수성 덕분에, 저는 고전 및 현대 물리학과 우주론의 철학과 역사라는 제 연구 주제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배우고 또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인 학회와 세미나에 참여하는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학위 논문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학부 시절 저는 야학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면서 동료들과 교재를 집필하거나, 학과 학생회 소속으로 신문을 제작하는 등, 학과 외의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에서는 학업과 학업 외 활동의 병행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저는 학업과 동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학생회 편집부 소속으로 대학원신문을 만들거나, 당시만 해도 처음으로 시도되고 있었던 학부 토론수업의 조교를 맡아 수강생들 사이의 토론을 직접 진행한 일이 그것입니다.
석사 졸업 후 유학을 준비하던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저는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과학기술과여성위원회나 과학기술 내 여성 참여(WISE, Women in Science and Engineering)와 관련한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습니다. 동시에 『아나키즘의 역사 (원제 L'histoire de l'anarchisme)』를 번역 출판하는 과정에서 역자 후기를 담당하는 등 후반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한편 프랑스 사회의 현안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 학술서 『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을 동료 유학생들과 공동으로 저술했습니다. 그 밖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고등학교의 철학 교육, 콜레주드프랑스와 같은 고등교육기관이나 국제철학학교와 같은 비제도권 교육기관에서 열리는 다양한 수업들, 그리고 라디오프랑스와 같은 공영매체에서 대중을 상대로 진행하는 철학 관련 프로그램들 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철학 교육 체계 전반과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학문 안팎의 경험들이 지적 자양분이 되고 있었음을 저는 “철학의 이해”나 “영화로 생각하기”와 같은 교양수업들을 강의하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학부 시절부터 과학철학과 관련해서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커리큘럼을 경험했다고 자부합니다. 철학과 전공과목으로 개설된 과학철학 수강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철학도의 길을 걸으면서부터는 영미 과학철학 중심의 독회에 참여하는 한편, 제도권 안팎의 여러 수업과 세미나도 찾아다니면서 과학학 전반을 두루 접했습니다. 대학원 석사 시절에는 “철학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제목의 학과 조교를 맡아 토론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또 “과학기술의 인식론과 역사”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던 파리 유학 시절에는, 과학철학 일반이나 물리의 역사와 철학에서부터, 역사학 방법론, 과학사 사례 연구, 과학사회학, 기술의 역사와 철학 등을 배우는 한편으로, 그리고 파리에서 열리는 다양한 관련 학회와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다양한 분야와 시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철학 강의는 제게 지금까지 가장 많이 보고 배우고 또 생각해 온 내용을 정리하고 전달할 최적의 기회요, 또 수강생들에게도 비교적 보기 드물게 다채로운 교수자의 경험을 공유할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 2020년 6월에 적은 글을 2023년 8월 마지막날 옮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