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2일 토요일

왜 하필 이 시점에

이곳 생각이 났을까. 마감을 이미 넘겨버린 발표문 때문인가? 자포자기? 일생일대 중요한 일들 중 몇 개를 줄줄이 앞두고 그제부터 일이 이상하게 풀리지 않는 느낌. 불안감. 아이폰으로 글을 적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이 아이폰 SE의 성능이 저하된 탓도 있는 듯하다. 애플 뮤직의 굿 바이브 리스트를 틀었는데 라나 델 레이의 나른한 목소리가 나온다. 가사가 달달해선가? 숙대입구에서 충무로 가는 길...

급히 마무리하던 글을 다시 꺼내다. 지금은 이 글을 처음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후, 그리고 지금은 다시, 아니 어쩌면 여전히, 충무로다. 

이제껏 이곳에서 지켜오던 원칙을 깨고 지명을 약자가 아닌 실명으로 적은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었을까? 이 글이 제대로 마무리되었다면, 즉 적어도 통상적인 과정을 거쳤더라면, 그 과정 중에 검열이 시행되었을 것이고 그러면서 익명화 처리도 이루어졌으리라. 그러나 이번에는 2개월 전의 기록을 있는 보존한다는 취지에서 그대로 남기기로 한다.

지난 2개월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 중 하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지난 2년도 그랬다. 2번의 이직. 그리고 그보다 최소한 2번의 이사. 그 외에도 자잘한 이동이 여러 번이나.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15년 가까이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면서는 정작 한 곳에서 10년을 넘게 살았던 반면, 귀국 후 비로소 원주민/토착민으로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 만한 조건을 갖춘 이후로는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유목민으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다 지난 2개월 사이에는 이제껏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도시에 한 달 새 두세 번을 드나들었고 급기야 오는 9월부터는 바로 그 도시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제 조금은 더 안정적인 삶을 구가하게 된 셈. 그렇지만 당분간은, 적어도 앞으로 1년 간은, 안정까지는 힘들겠고 그저 준안정 상태 정도만 바랄 뿐.

그런데 왜 또 하필 이 시점에 이곳 생각이 났을까? 

우선은 이사를 1주일 남겨둔 상태... 라는 것이 이유겠다. 이것이 어떻게 이유가 될 수 있냐고? 좋게 말하면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예의 그 고질적인 현실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가 하면... 도대체 할 일이 한둘인가? 

우선은 쓰던, 아니 실은 거의 시작도 안 한, 논문을 20일까지 내야 하는데... 20일이 바로 이삿날이고, 이래저래 정리할 시간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논문은 15일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 15일은 마침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 개봉일이다. 마침 이 논문은 양자역학 (어쩌면 그리고/또는 양자장론!)에 관한 것이므로 어쨌든 관련 내용을 다루고 마침 개봉까지 한 이 영화를 언급하거나 나아가 분석하면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좋은 접근이 되리라 생각된다. 마침 논문에서 다루어야 하는 저자(캐런 버라드)도 양자역학과 원자폭탄을 다룬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니.

방학까지 번역을 대강 마쳐놓기로 한 "히스테리의 발명". 그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는 관련해서 논문도 하나 발표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그 상황에서는 벗어났다. 그렇지만 올해 안으로 저 번역을 마쳐야 하는 상황은 그대로다. 그러나 상황 상 오는 겨울방학을 기다려야 할 듯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다른 번역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논문에 대한 부담의 무게를 이전보다는 어느 정도 덜어낸 채로 번역에 임할 수 있게 되어 다행.

기출판 논문 교정 후 개고 및 가이아를 적용한 작품/작가론. 당분간은 불가.

무엇보다도 9월부터 바로 시작할 수업이 무려 세 개나 된다. 게다가 그  중에서 둘은 처음 해보는 윤리학 수업. 물론 이전의 토론 수업에서 윤리학 관련 내용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 바 있으므로 그때 쌓은 콘텐츠를 적극 이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강의는 새롭든 새롭지 않든 늘 부담이긴 매한가지. 

생각해 보니 지난 2개월을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 중 하나"라 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겠다. 6월은 숨가삐 보냈으나 7월에는 하필 코로나에 확진되는 바람에 거의 아무 것도 못 했으니. 차라리 코로나는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확진 후 2주 정도야 증상 때문에 그렇다 쳐도 그 이후에는 그냥 시간을 흘려 보낸 것이다.

조금 아까 잠깐 바깥에 나가 보니 바람이 제법 부는 것이 한여름은 다 지나간 것임에 분명하다. 다가올 가을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고조되는 "8월 말, 9월 초" 시기.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동명 영화(Fin août, début septembre)는 박사과정 동안 그야말로 내 인생 영화였는데 지금이라고 달라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그러나 사실 심정적으로만 그렇고 에릭 로메르의 "가을 이야기(Conte d'automne)"에 보다 가까워진 것이 현실. 대학생이 된 아들을 두고 아들의 여자친구와 우정을 나누며 그녀의 전 남자친구이자 고등학교 철학교사였던 동년배 중년 남성의 소개를 받는 중년 여성을 그린 그 영화 말이다. 왜 하필 이 시점에 이 영화가 생각났는가 하면... 며칠 전 그 영화 주인공의 나이를 넘어섰기 때문일 수 있겠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과의 불화를 끝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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