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 그 옆에 오도카니 떨어져 있는 공중벤치. 여자는 벤치에 앉았고 남자는 서 있다. 여자는 여자가 몸을 숙이고 남자 바지 뒤춤을 봐주고 있다. 바지 끝자락이 길어 신발 뒤로 내려와 밟혔는지 여자에게 걷어달라 한 모양이다. 아니 자기는 손이 없나, 애도 아니고, 저런 건장한 풍채의 사나이가, 하고 속으로 흉을 보다, 그의 우람한 어깨에 드리워진 멜빵에 시선이 갔는데, 아, 순간 더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 남자는 아기를 앞으로 둘러메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 팔에는 코끼리가 그려진 기저귀 가방을 멘 채로. 그래서 제 스스로 바지 뒷단을 손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더운 날에. 그러다 기저귀 가방을 걸친 팔에 시선이 이동하게 되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역시나 단단해 보이는 팔뚝은 온갖 종류의 문신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팔 전체가 시퍼렇게 보일 정도로.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또 어떤가.
바지춤이 정리가 되자 아기와 오롯이 남겨진 남자. 그러자 그는 그 문신으로 빼곡한 양팔로 아기 어깨를 감싸쥐고는 아이와 둘만의 대화를 시작한다. 한없이 익살스럽고 다정스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아기가 사랑스러워서 못견디겠는, 그리고 행복에 겨운 것이 멀찍이 떨어진 내게도 확연히 느껴진다.
사실 남자는 그냥 봤더라면 스킨헤드와 문신 때문에 나로서는 사실 좀 무섭고, 더구나 아이들이 보면 더더욱 무서워할 것 같은 외모. 그런 외모의 소유자가 아기를 업느라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나머지 동반자에게 아이같이 의존해야 하는 상황, 이것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러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판 성(聖)가족, 아니 (세)속(俗)가족의 초상이기도 하다. 아기 예수를 몸소 업고 어르고 달래는 요셉과 육아의 짐을 덜은 대신에 "가장"의 몫을 대신하거나 최소한 공유하는 마리아. 백년 전, 아니 한 오십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낡고 고정된 성역할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상당수의 사회에서는 여전히 상상가능은 해도 실제로 보기는 드문 장면일 것이다. 이런 장면이 상상가능하고 또 실제로 실현가능한 시대와 공간에 사는 것이 참 다행스러운, 그리고 어쩌면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어쩔 수 없는 박탈감과 자조감이 동반되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