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3일 월요일

Der schwer gefaßte Entschluß, from Schwarze Sünde (Huillet-Straub, 1989)

장-마리 스트로브가 이전 작품들 몇 개를 모아 엮어서 내놓은 신작 Kommunisten. 이 사람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녹록치 않았음은 당연하다. 그 유명한 스트로브식 트레블링 혹은 고정샷은 감탄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했으나 아무래도 너무 오래 지속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등장인물들이 나와 낭독하는 앙드레 말로나 프리드리히 횔덜린이나 이탈리아 작가 체자레 파베제 등등의 유려한 운문 혹은 산문시들을 감상하기에는 아무래도 내 언어 실력이나 문학적 편력이 모자랐는지, 상영 내내 소외감 혹은 거리감에서 헤어날 길 없었는데... 

그러나 뜻밖에 은총의 순간을 맞이하였으니. 영화 말미,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 4중주 중 마지막인 동시에 가 생애 최후로 남긴 작품이기도 한 16번의 마지막 악장이 나왔던 것이다 (36:32 가량). 


베토벤은 이 마지막 악장에 "Der schwer gefaßte Entschluß", 즉 "어려운 결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악장은 육필 악보에 작곡가가 적은 "Muß es sein?", 즉 "그래야 하는가?", 그리고 "Es muß sein!", "그래야 한다!"라는 문구로도 유명하다.  

Schwarze Sünde 는 횔덜린이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에 관해 쓴 동명의 작품을 원안으로 한 위예-스트로브 커플의 1989년 작품이다. 이번 선집에서 편집된 부분은 오직 이 마지막 장면 뿐이다. 화면은 흙바닥에 앉아 두손으로 목을 감싼 채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는 여성 인물에 고정돼 있다. 카메라는 물론이고 그녀 또한 꿈쩍하지 않고 있다. 그 뒤로 문제의 4악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느리고 가냘픈 선율. 그라베, 마 논 트로포 트라토. 이곳이 "그래야 하는가?"에 해당하는 절이다. 회의와 의심과 의문의 단계. 그러던 어느 한 순간,  그녀가 손을 내리고는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카메라를 향해 결연히 말한다. 아니 외친다. Neue Welt, 새로운 세상. 그와 동시에, 악기들이 원기를 회복한 듯 활기찬 알레그로가 이어진다. 진짜로 "그래야 한다!"고 합창하는 것 같다. 당위와 필연, 남은 것은 결단과 행동 뿐이라는 듯. 

이 장면이 깜짝선물과도 같았다면, 영화 상영 뒤에 이어진 철학자 토니 네그리와의 대화는 덤이었달까. 보충수업 받는 자세로 임했는데 수업이 예상 외로 재미있었던 것이다. 감독 스트로브가 예고 없이 참석, 진행자와 초대손님은 뒷전이고 거의 독무대를 펼친 때문. 알고 보니 이 양반, 이런 자리가 있을 때 유사한 장면을 연출하곤 했던 모양이다. 나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일이 있다. 그게 벌써 수년 전 일인데,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는 걸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났다. 타협을 모르는 고집. 독자적 행보. 이런 것들이, 그의 표현대로, 포르노그라피가 범람하는 현대 영화계에서의 그가 갖는 독보적 위치를 가능케 했겠다. 

그는 빨간 실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일종의 아드리아드네의 줄. 그런데 그게 코뮤니스트에게는 색깔이 빨갛게 보이기도 하겠다). 그 실이 던져지는 순간이 있다고.  그러면 실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이것이 바로 "그래야 한다!"의 필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실이 눈앞에 던져지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의심에 부치고 의문을 품을 것 없이 그저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래야 한다!"는, "그래야 한다!"야말로, 정언명령인 것이다. 그리고 필연은 가능을 함축한다 (칸트). 그리하여 "그래야 한다!"는 "그럴 수 있다"로 의역될 수 있다. 기왕이면 느낌표는 직역하자. 그럴 수 있다!


참고문헌

String Quartet No. 16 (Beethoven)
La politique de Straub-Huillet par Daniel Fairfax (Péri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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