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마지막 생계 유지 수단이 택시 운전이었어요. 시작한 뒤에는 승객을 대상으로 철학 강의를 펼쳐 유명해졌다네요. 그야말로 홍세화 선생이 말하던, 플라톤을 논하는 파리 택시 운전사의 원형.
그러다가 하루는 한 십대 소녀를 승객으로 태우는데 그 소녀의 부모에게 고소를 당해요. 무슨 저녁 강연을 들으러 나선 소녀가 새벽이 되어서야 귀가했다는 거죠. 심각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어쨌든 부모는 운전사가 수상하다며 택시노조에 항의해요. 이에 택시노조는 일종의 징계위원회를 열고 보튈에게 증언을 요구하죠.
여기에서 보튈은 처음부터 사건 경위를 보고하는 대신 니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요. 저녁에 시작한 위원회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나고. 그 진술을 기록한 게 <니체, 정오의 악마>라는 책이에요. 책이라지만 사실은 진술서인 게죠.
진술의 대부분은 니체, 그리고 니체의 연인이자 보튈 자신의 연인이기도 했던 루 살로메에게 할애되죠. 보튈에 따르면 루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의 좌절이 결국 니체의 광기의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건데.
니체도 그렇지만 왜 그렇게 많은 남성들, 그것도, 릴케와, 아마도 프로이트까지 포함한, 걸출한 인물들이 루 살로메에게 빠졌는가? 이를 보튈은 "정오의 악마(démon de midi)"라 불리는 중년 남성의 권태와 무기력증과 의욕상실 등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심리 상태로 설명해요. 심리 상태나 정서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자신 하나의 독립된 존재라고도 하죠. 바이러스나 미생물에 준할지언정 어쨌든 나름의 존재론적 가치를 갖는. 우리말의 魔 같은 것.
보튈의 해석에 따르면, 정오의 악마가 하는 일이란 이제 막 성징을 드러내는 소녀를 통해 원초적 여성성과 생명성의 태동을 환기하고 새로운 탄생 혹은 재탄생에 대한 희망과 착각을 제공한다는 건데. 이 시대 독자들로서는, 저 같이 원작 소설을 읽지 않은 경우를 포함해서, 롤리타 컴플렉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죠. 20년대이니 아직 나보코프 소설이 나오기 전이긴 하지만. 참고로 루 살로메의 본명이 리올리타였어요. 다만 우연의 일치이고 나보코프가 이를 참조했다는 증거는 없지만요.
많이 알려져 있듯 루 살로메는 신체적 매력에서는 보잘 것 없었다 하죠. 특히 빈약한 가슴은 조롱거리였고 (보튈은, "네가 빈약한 가슴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네 심장과 내 심장이 가까이 맞닿을 수 있으니" 라는 볼테르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한다는 말이, 니체가 볼테르 정도의 유머 감각이 있었더라면 루에게 허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처음에는 좀 기가 막혔는데, 다시 보니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그렇다면 그녀의 매력은 온전히 정신적, 관념적인 수준으로 한정되어 있었던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성적인 대상이긴 했으되, 그것이 환기하는 욕망을 실제로 충족시키기보다는 대상을 상징의 차원에 한정하도록 하면서, 아니 오히려 그런 까닭에, 결국 욕망의 주체들을 파멸에 이르게 한. 딸내미도 그렇지만 어쨌든 소녀는 금기의 대상이니까요. 루의 매력은, 소위 지성미와는 별개로, 소녀/소년/아이를 연상시킴으로써 금기의 욕망을 자극하는 육체에 있었다는 거죠.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그야말로 모호한 대상.
그러고 보니 뷔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 이 지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네요. 중년 남성, 그리고 동정녀와 창녀를 동시에 육화한 젊은 여성, 정조대, 피묻은 흰 속곳, 그리고 마지막의 폭발 사고...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한 알레고리는 배우에게서 나오죠. 여주인공 콘치타의 역할을 두 여배우가 맡아서 교대로 출연하는데, 얼굴이나 몸매나 억양이나 전체적인 분위기 등등에서 둘 사이에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고 유사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는 머리(둘다 갈색 머리)와 의상이 유일한 정도. 대신 일관성, 혹은 도식성은 어느 정도 지켜져서, 콘치타의 동정녀로서의 측면이 강조될 때면 호리호리한 몸매에 지적인 분위기의 소유자인 카롤 부케가, 반대의 측면을 위해서는 풍만하고 강한 억양을 쓰는 스페인 여배우가, 각각 등장하는 식. 둘 다 십대 소녀의 역할을 맡기에는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이 역시 뷔뉘엘 특유의 초현실적 장치이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거랑 한국 30-40대 남성들의 이른바 소녀시대/아이유 신드롬-"삼촌"팬덤 현상은 어떤 관계인가? 과연 이들이 소녀 아이돌에 열광하는 것이 권태와 무기력증이라는 일종의 "실존적" 정서의 다른 표현인가? 따뜻한 미모 때문에 잉그리드 버그만을 좋아한다며 수줍게 말하던 노년의 피천득 선생의 감성과 같다고 볼 수 있는가? 일전에 해당 인구층에 속하는 누군가에게 이를 지적하면서 "욕망에 솔직한 게 뭐가 나쁘냐면 할 말 없지만 욕망을 너무 떳떳하고 무반성적으로 드러내면서 거기에다가 이를 어떤 소년적이고 순수한 감수성으로 포장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힌다"라고 제가 막 몰아붙인 적이 있어요. 말해 놓고선 내가 너무했나 싶기도 했는데, 막상 그 사람이 내 말을 부인하지 않고 욕망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솔직히 시인하니까 오히려 실망감이... 사실 부인해 주길 내심 바랐는지도.
제가 요사이 이 문제에 민감해진 건 사실이에요. 나이듦, 특히 여성으로서의 나이듦, 여성성, 성적 매력 등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데, 그 중에서 가장 반동적이고 문제적인 걸 꼽자면, 나의 "(여)성적 매력"이란 것이 갈수록 반감되고 있고 (예전에 그런 것이 제게 어느 정도 있었다는 가정 하에. 이 가정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그와 비례해서 나의 존재 가치가 하락하고 위치가 강등되고 있다는 박탈감과 자격지심. 사람들이 서로를 그런 식으로 가치를 매기는 것, 그리고 누군가 나를 그런 잣대로 평가하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거라 생각하면, 더 끔찍하게는, 예전에도 그랬고 그런 관점에서 내 연애사 또한 재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때 누구누구가 나를 거절한 이유가 결국에는 성적 매력의 결핍 때문이었다니"), 너무 속상하고 실망스러워요. 가장 끔찍한 건 이런 생각이나 하는 제 자신이지만.
- 2013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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