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포스트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인생 최고 흑역사와 후일담 에 이어진 글. 그렇지만 실은 그 글 앞에 쓰여진 글. 인생 최고의 흑역사를 쓴 바로 그날 하루 전에 써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계단 인사말이 되겠다.
3 juil. 2019 à 21:50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책이나 다른 글들로 접했던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 뵙고 또 이렇게 앞에 모시고 발표까지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발표 기회를 주신 학회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아울러 발제문을 사전에 준비하지 못하고, 또, 발표 형식 면에서도, 준비한 원고를 그대로 읽는 (그것도 객석과 공유하지도 않고 혼자서만) 유럽 인문학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점에 대해서도, 양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게는 이 자리가 몇 가지 점에서 감회가 더더욱 새롭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1년 전인 2008년 바로 이 자리에서 세계철학자대회가 열렸고 당시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저는 처음으로 모국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계셨던 몇몇 선생님들을 이 자리에서 다시 뵙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럽 분석철학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택한 주제가 바로 아돌프 그륀바움의 유신론적 우주론 비판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손을 놓고 있었던 이 주제를 소환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지난해, 논문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륀바움의 별세 소식을 접했습니다. 10년 동안 이 주제와 관련해서 발전하거나 달라진 논의는 없는지 확인해 보고도 싶었습니다. 오늘 발표는 차후 이 주제에 대해 보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한 시론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제 김상욱 선생님 발표에서 나왔던 "우주는 심심하다"라는 명언, 기억하실 겁니다. 우주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어떤 의도 없이 생겨나 또 운행되고 있다. 또 그 안의 운동도 특정한 의미 없이 진행된다. 우주에 대한 과학자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고 여기 계신 철학자 여러분도 아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중요한 학회 발표를 앞두고도 준비가 미진한 상황에서 세상이 내일 멸망했으면, 아니 아예 소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혹시 해본 적 없으신지요? (그런 생각 해본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 있는데 누구라고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세상이 소멸해서 없어진 상황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해보게 되는 상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나, 지구나 태양을 포함한 천체들이, 개별적으로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해도, 그 모든 것을 포괄하고 포함하는 총체로서의 우주 전체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사실 상상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주가 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 가능하다. 우주가 없었거나 앞으로 없어지는 일이 가능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이러한 일들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기독교-유대교의 도그마를 거쳐서, 가능할 뿐 아니라 당위적인 사실이 되었고, 이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로 그 문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 저 인사말을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설마 발표문을 준비하지 못하고, 발표문을 준비하지 못했더라도 발표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에 내리리라고는, 그리하여 이름하여 "서울역 회군"의 역사를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런데 어제 자정이 마감이라던 그 글은? 아직 못 썼다... 그리고 학회지 담당인 편집이사님께 메일로 슬쩍 마감 연장 여부를 물어봤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학회 대표 계정으로 문의했던 것임을 조금 전에야 알았다. 이쯤 되면 이 학회하고는, 아니 이 학계와는 도통 연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