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만큼 홍상수 영화에서 제목이 명목상에 지나지는 않으리라 믿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제목에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대부분, 아니 전부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쓰이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우연이라 하더라도 이는 단순한 수사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우연에 관해 명시적으로 천착한 <북촌방향> 외에도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우연을 라이트모티프로 쓰고 있는 작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이 지점에서만큼은 홍상수가 "우연이라 해서 요행한 것은 아니다(Le hasard n'est pas fortuit)"를 좌우명으로 삼은 로메르의 제자임은 확실하다. 우연이고 특별한 법칙이 없다 해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렇담 저 여성형의 이름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 수정>은 세기말적 퇴폐와 염세와 비관으로 가득했던 90년대 말의 첫 두 작품 이후 2000년대를 연 영화. 돌이켜보면 코미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였던 것 같다. 장르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인 의미에서의 전환. 냉소와 자기조롱과 희화화로. 그러나 무엇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같은 사건과 역사를 세 인물들의 상이한 시점에서 전개하는 방식의 새로움에 경탄하던 내게 당시 사람들이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들며 그때부터 이미 진부함을 언급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제사 다시 생각해 보면 진부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다중시점이라는 하나의 틀로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성급하게 봉합한 비평적 태도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더 주목해서 봐야 했던 것은 이러한 장치를 통해, 그 장치가 비록 진부하긴 했을지언정, 사건들과 시간이 새롭게 짜여지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홍상수 세계에서 이 영화가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수정"의 표제 등장에 있지 않았을까. 수정은 처음 두 남자 각각의 버전에서는 그저 새침하고 애태우는 처녀(!)이거나 흔들리는 갈대로 그려지는데, 이 버전들은 결국 마지막 수정 버전에서 최종적으로 종합된다. 그러나 수정은 셋 중 가능한 하나의 버전을 제시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나아가 이후 역사의 전개에 있어 열쇠를 쥐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었기에. 그녀의 시선에서 사건이 재해석될 때, 아니 사실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질 때, 우리는 그녀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고, 아마도 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부잣집 아들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했고, 우연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였던 사건이 실은 그녀에 의해 교묘하게 계획된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수정의 시선 및 역사 주체로서의 힘은 거의 전적으로 작가에게서 온다. 그녀는 사실 시선의 주체가 아니라, 작가의 대리물, 아니 그마저도 안되는, 여성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체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뭐 이런 구조야 굳이 이 작품에, 아니 이 작가에게만 해당되겠냐마는... 어쨌든 이런 이유로 영화가 내겐 불편했고, 당시 같이 본 이들에게도 그러했고, 그들과 술 마시며 한탄했다 ("영화가 왜 이리 척척해" 하고 그 낭창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ㅅ 언니의 기억이 문득). 그리고는 한동안은 홍상수 영화로부터 멀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그의 관객이 되었다. 언젠가부터라 했지만 그 시점은 정확히 꼽을 수 있다. <해변의 여인>부터였다. 작가의 페르소나와 그 남성적이고 독단적인 시선이 영화를 지배하던 경향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진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그래도 좀 생기와 존재이유가 느껴지는 여성 인물의 등장 (고현정). 그때가 홍상수 영화에서도 어떤 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최소한 관객으로서의 내게는 그랬다 (이는 또 로메르적 전환이라고도 하겠다. 실로 로메르에게서도 Contes moraux 연작에서 Comédies et proverbes 연작 사이에 유사한 종류의 전환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좀더 밀고 나가면 일종의 타자의 발견이자 여성성의 (재)발견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니" 식의 무성의하고 무의미한 찬미이거나 변명은 아니고 (그렇다 해도 참기 힘든데 그러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마저도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내겐 최악의 홍상수), 실제로 작가에게도 발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는 잘 몰랐거나 관심이 없던 신세계를 발견한 자의 경이 같은 것이 적어도 내겐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영화마다 아주 미세하고 느릿한 변화가 감지되었고(이를테면 엄마라는 존재의 등장 같은 것), 그런 변화들을 추적하는 재미가 붙었다. 같은 이야기의 반복인 듯해도 그 반복의 대상이 동일한 것은 아니어서 겨우 식별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담지하고 그러면서 점진적 변화를 이루는 생명체의 성장 및 진화 과정을 참관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홍상수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꼬박 챙겨보는 최근의 거의 유일한 감독이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꼬박 챙겨서 개봉하는 유일한 한국 감독이라는 변인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수정 이후 다시 그야말로 타이틀 롤로 등장한 인물은 <옥희의 영화>의 옥희. 이 영화는 내겐 다소 충격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이 찡해져왔던 것이다. 세상에, 홍상수 영화 보며 내가 가슴이 찡해오는 경험을 다 하다니.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옥희의 존재. 아니 옥희라는 행위. 배우이자 행위주체(acteur ou bien même actrice !)로서의. 영화는 이전까지 홍상수 영화에 숱하게 나왔으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감독/교수/지식인 남성이 아니라 영화과 학생인 옥희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시점이라 하지만 그녀의 시점은 구심점 혹은 초점이라기보다 그녀가 영화 안에서 스스로 만드는 영화, 그리고 삶을 그리는 수많은 가능한 시선이 만나는 교차지점에 가깝다. 그 어느 전지적, 아니 하다못해 우월한 시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 시선의 해체. 시선의 탈중심화.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까지 이어진다. 비록 주인공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구도나 구조 면에서는 옥희의 경우와 유사하다. 역시 영화과 여학생이 구상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전개되고 게다가 이 전지적 작가의 역할은 같은 배우(정유미)가 맡았다. 그런데 이 작가의 페르소나는 또 이자벨 위페르가 맡은 프랑스 여성 안느이다. "시간을 때우고자 시나리오를 하나 쓰기로 한다. 주인공은 얼마 전 영화제에서 본 프랑스 여성 감독으로 한다." 이방인 여성의 시선. 그리하여 시점은 단지 한 평면에서 다중화될 뿐 아니라 다(차)원화된다.
그러나 정작 <누구의 딸도 아닌...>과 <우리선희>에서는 다소 주춤한 듯 보인다. 각각의 표제인물 해원과 선희는 사실 옥희보다는 수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수정만큼 절망적이는 않았던 것은, 해원이나 선희나 수정만큼은 아니어도 어쨌든 꽤나 답답한 상황인데, 그래도 그나마, 어떤 여성적 계기(moment)들이 있어 뭐랄까, 숨통 장치 같은 역할을 해준 때문일 것이다. 제인 버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해원 엄마 역으로 등장한 김자옥. 이 역시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 홍상수 영화에, 윤여정까지야 그렇다 치는데, 김자옥을 보게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캐나다로 이민 간다는, 최소한 홍상수의 작품 세계에서는 다소 생경한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녀와 해원이 만든 모녀 관계가 내겐 참 낯설고도 신선했다. 아무리 떨어져 산다 해도 모녀가 어쩜 저렇게 서로를 어쩜 저렇게 남 대하듯 할까. 엄마가 딸한테 "얘, 넌 어쩜 그렇게 예쁘니? 미스코리아 나가보는 건 어떠니?"라질 않나, 딸은 딸대로 "멀어져 가는 엄마의 뒤태가 처녀처럼 날씬했다" 라질 않나. 근데 그래서 오히려 해원이의 해맑은 얼굴이 안돼 보이진 않았는데, 그에 반해 선희에게선 다시 안타까움이. 세 남자에 둘러싸인 선희. 그래도 마지막에 그 세 남자들이 모인 자리. 저마다 선희를 만날 것을 기대하고서. 그러나 선희는 그 자리에 없다. 세 사람과의 관계와 시선에 얽매인 듯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그녀는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두 영화를 여성성-시간성을 두 축으로 하는 계보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최근작 <자유의 언덕>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일단 제목도 그러하고, 어쩌면 오히려 주인공이 시간에 관한 책을 읽으며 시간에 대한 사변을 늘어놓으면서도 가장 탈시간적이고 무시간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영화가 위의 시간성-여성성 계보에 속하며 그 정점을 이루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 모리는 읽고 있다는 시간에 관한 책에 관해 말한다. "결국 시간은 결국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경험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라는 것은 다 우리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이 이론에 대한 영화적 고찰이자 어쩌면 입증이다.
일본인 모리가 영어로 쓴 편지를 편지의 수신인인 권이 읽는다. 영화는 바로 권이 편지를 읽는 관점과 순서대로 진행된다. 그런데 권은 중간에 편지를 읽다가 떨어뜨리고 그 뒤로 편지의 순서는 마구 뒤섞이고 이에 따라 영화의 시간적 순서 및 서사도 뒤섞인다. 그에 따라 사건들은 반복해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화자이자 작자는 이방인 남성 모리이지만 여기에서 서사의 열쇠를 쥔 것은 독자이자 수신인인 권이다.
펠리니의 <사티리콘>도 그러했다. <사티리콘>은 남겨진 중 최고의, 즉 가장 오래된 라틴문학이자 말하자면 사상 최초의 소설인데, 완본은 없고 다만 단편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남겨진 부분만 보면 이야기가 연결이 전혀 안 되고 뭐가 뭐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니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포스트모던하다고도 헐 수 있는 것인데. 이를 펠리니는 있는 그대로, 즉 남아있는 판본 그대로 따다가 영화화했고, 그리하여 자연히 영화도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사실 펠리니의 다른 영화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나). 가장 오래된 예술형식인 문학과 가장 최근에 발명된 형식에 속하는 영화의 조우. 여기에서 양자를 가르는 역사의 차이, 그리고 영화 탄생 후 흐른 12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는 무화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영화적 시간, 특히 현대영화에서의 시간, 이미지-시간과 (고전)문학적 혹은 서사적 시간성, 연대기적 시간(chronologie, chronos+logos)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영화의 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심리적 시간, 온전히 경험하는 가장 순수 상태의 시간(프루스트), 말하자면 지속에 가깝게 표상된다. 요컨대 베르그손적 의미에서 가장 덜 영화적인(cinématographique) 방식으로. 과장하면 가장 베르그손적으로.
펠리니의 <사티리콘>도 그러했다. <사티리콘>은 남겨진 중 최고의, 즉 가장 오래된 라틴문학이자 말하자면 사상 최초의 소설인데, 완본은 없고 다만 단편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남겨진 부분만 보면 이야기가 연결이 전혀 안 되고 뭐가 뭐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니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포스트모던하다고도 헐 수 있는 것인데. 이를 펠리니는 있는 그대로, 즉 남아있는 판본 그대로 따다가 영화화했고, 그리하여 자연히 영화도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사실 펠리니의 다른 영화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나). 가장 오래된 예술형식인 문학과 가장 최근에 발명된 형식에 속하는 영화의 조우. 여기에서 양자를 가르는 역사의 차이, 그리고 영화 탄생 후 흐른 12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는 무화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영화적 시간, 특히 현대영화에서의 시간, 이미지-시간과 (고전)문학적 혹은 서사적 시간성, 연대기적 시간(chronologie, chronos+logos)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영화의 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심리적 시간, 온전히 경험하는 가장 순수 상태의 시간(프루스트), 말하자면 지속에 가깝게 표상된다. 요컨대 베르그손적 의미에서 가장 덜 영화적인(cinématographique) 방식으로. 과장하면 가장 베르그손적으로.
<자유의 언덕>은 결말 또한 충격이었다. 몹시 비현실적이고 더더군다나 홍상수의 세계에선 더더욱 그러한, 그야말로 동화적인 것이었기에. 그야말로 극적으로 해후하여 나란히 언덕길을 걷는 두 사람 뒤로 모리의 내레이션은 거의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여 아이도 많이 낳아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수준. 이십년 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하드코어 치정극 결말을 생각해 보면 정말 이것은 혁명적이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 그보다는 시간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