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ㄴ 언니에게
무심히 보낸 짧은 메세지가 이렇게 세심하게 쓰인 장문의 편지로 돌아오다니. 제가 있는 지금의 여기와 차원이 다른 우주 어딘가로부터 날아온 편지 같아요. 수녀원이라는 공간, 그곳에서 당신이 지내신 일주일 남짓한, 아니 이제 이주가 넘어가는 시간, 그 세계와 이 속세는 질서도 논리도 이렇게 다르군요.
논문을 쓰기 위해선 오롯이 혼자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당신. 재미있는 것이 마침 저는 그와 전혀 반대인 깨달음을 얻고 그에 따라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이었거든요. 너무도 오랜동안 혼자서 살고 쓰고 사유해 왔고, 이것이야말로 지체 및 퇴보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다는 거죠. 사실 이 깨달음도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에요.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물체는 자기 운동을 지속한다는 것이 근대역학의 근간이 된 관성원리. 이 원리는 제가 논문에서도 조금 다루는데 볼 때마다 제 경우에 비춰보곤 했죠 (실제로 데카르트와 갈릴레오에 의해 정립된 이 원리에서 인간학과 윤리의 기본 원리를 유추한 경우가 제법 있었죠. 스피노자, 루소 등. 덧붙이면 속도가 변치 않은 상태로 제 운동을 지속하는 물체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말하자면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은 멈춰있고 다른 물체들이 움직이는 것으로 인지한다는 것이 갈릴레오 상대성원리). 너무도 오래 관성 운동을 지속해 오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웬만한 외부 자극에는 꿈쩍도 않게 되었던 것인데. 그러다 얼마 전,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새삼스런 자각에, 바닥에 남은 마지막 용기와 의지를 끌어모아 외부 세계를 향한 창을 다시 열게 된 것이죠.
십수 년만에 안과에 가서 검사를 받고 안경을 맞춰서 쓰기 시작했어요. 써보니 그 동안 얼마나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살아왔는지 알겠더라고요. 작년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하면서 파리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는데, 이번에는 그 이상이에요.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그야말로 계몽, 즉 미몽의 상태에서 깨어난, 나아가 새로 태어난 기분.
지난 주에는 오랜만에, 실로 너무나도 오래만에, 콜로크 하나에 참석했어요. "사상사"가 주제였는데 푸코에 대한 언급이 많았죠. 딱히 푸코를 전공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재직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열린 만큼, 그리고 그가 해당 혹은 유사 분야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니만큼. 덕분에 지적인 자극과 자신감을 동시에 얻었어요. 푸코의 고고학을 방법론적으로 차용해서 고전시대 우주론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제 논문 1부의 목표거든요. 꼭 푸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만 푸카디앙임을 천명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내 주장과 주관이 확실하고 그 안에 나만의 고유한 해석을 녹여내면 그것만으로도 의의를 찾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 (푸코나 사상사와는 무관하게 얻은 것이지만 사후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푸코랑은 전혀 무관하지는 않겠네요. 다 그가 다룬 주제들) : 순수한 앎에의 의지, 지적 욕망보다, 일정한 지적 수준을 인정받고 싶은, 그야말로 인정욕, 그리하여 결국에는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고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말하자면 권력에의 의지가 앞서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이것이 그동안 내 논문에, 나아가 삶에서 얼마나 큰 장애물로 작용해 왔는가.
근처에 간 김에 오랜 만에 푸앵카레 연구원 도서관에, 그리고 저녁에는 주느비에브 도서관에 갔는데, 주느비에브에선 아,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주느비에브는 제가 이곳에 온 직후 자주 드나들었던 도서관. 당시 수업이 주로 근처 쥐시유에서 있었고, 또 당시만 해도 저녁 늦게까지 개관하는 도서관이 퐁피두 말고는 유일했던 까닭에. 처음에는 도서 대출 및 출입 시스템을 몰라 입구를 마비시킨 일도 있었고, 그밖에도 당시에는 수치심으로 죽을 듯 괴로웠지만 이제사 다시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기억들로 가득한 곳. 높은 천장, 철제 궁륭, 넓은 열람실, 낡고 삐걱대는 책상과 의자, 청록빛 유리갓을 쓴 책상램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복제한 벽화, 모든 것이 그대로인 걸로 보였어요. 지난해 테러 이후 등록 및 재등록시 신분증을 요구하는 걸 빼면. 아, 무선인터넷이 가능해진 것도 있네요. 그리고 이는 무척 큰 변화.
그리고 무언가 일을 하나 도모했어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시도를 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정도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심각한 무기력증에 시달려 왔는지 짐작할 만하죠. 과감하고 무모해진 김에 지도교수에게도 메일을 보냈어요. 얼마 전 메일을 보냈는데 답이 없어 불안해 하던 차였거든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답장이 왔는데 건강에 문제가 있어 답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기다리라는 내용이었어요. 순간 걱정이 많이 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하고 불경하다고도 할 안도감이. 내가 잊혀지거나 아주 많이 밉보인 것은 아니구나, 그래도 희망이 없지 않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불행한 소식이고 가슴은 아프긴 해도 어쨌든 그로 인해 내겐 시간이 좀더 주어지게 된 셈이구나, 하는 생각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것이 정말로 마지막 기회겠구나, 하는 경각심이.
이제 당신이 돌아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돌아온 당신에겐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거고요. 나도 또 다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주인공이면 좋겠지만, 이번엔 힘들겠네요. "혹시 알아? 돌아와 보니 그 동안에 다 썼다고 할지?"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당신을 놀라게 해주고도 싶었는데. 그래도 다음에는, 조만간에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