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phée et Eurydice, Nicolas Poussin, 1664. Huile sur toile 124 x 200 cm. |
요전에 언급한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 이야기는 에우리디케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에우리디케 상황"의 원인이 되었던 에우리디케의 죽음이라는 사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어가는데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타느라 보지 못한다.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을 만큼 제법 가까운 위치에, 아니,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무엇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음에도!
내가 기억하는 푸생이라고는 루브르에 소장된 이른바 "풍경화"들, 그 중에서도 4계절 연작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 르네상스풍부터 고전주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했는 줄은 몰랐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인상파를 연상케 하는 붓터치마저. 그러나 아무래도 르네상스 회화, 특히 푸생과 비교되고 실제로 초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라파엘로에 비한다면, 전반적인 색조에서부터 인물의 표정과 안색까지가 무척 어둡고 윤곽마저도 희미하다는 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느낀 전반적인 인상. 조명 탓도 있겠으나 그림들 자체가 어찌나 어두운지 중간에 라파엘로가 한두 점 나오니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누가 더 천재였는지를 겨루는 것은 무의미하고, 나는 차라리 15-16세기 이탈리아와 17세기 프랑스 사이의 지역적이고 시대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좀더 나아가 말해 본다면, 시대보다는 오히려 토포스의 차이가 더 결정적이리라는 심증을 나는 가지고 있다. 똑같이 태양을 근원으로 가졌음에도 이탈리아에서 맞은 태양광은 프랑스에서와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지더란 말이다. 단지 일조"량"의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더란 말이다. 프랑스에서의 햇빛은 그저 눈만 밝히는 빛으로서의 역할이 전부요, 그마저도 실질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상징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전부인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좀더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것이어서 몸을 따스히 감싸는 볕의 기능도 충실히 수행한달까.
그러나 이것은 그저 옹호할 가치도 없고 나로서도 그럴 의지도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테제. 특히 내가 비교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프랑스라 함은 파리이고, 이탈리아라 함은 피렌체나 피사 등의 지중해를 낀 토스카나 지방이니, 비교가 부당함은 당연하다. 이 반론에 대한 재반론도 물론 가능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본산은 피렌체고 프랑스 회화 및 기타 예술의 중심지는 어쨌든 파리였으니까. 문제는 푸생의 경우 파리에서도 활동했지만 로마 교황청을 위해서도 일했고 결국 여생을 마무리한 것도 로마에서였다는 것.
좀더 진지하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본다면 이렇다. 종교개혁 이후 구교 세력이 신교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미지숭상(iconolatrie)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는 과정에서 특히 회화를 장려했고, 이러한 배경을 업고 17세기 종교화의 경향을 바로 대표하는 것이 바로 푸생이다. 그러나 동시에 푸생은 17세기, 화이트헤드가 "천재의 시기"라 부른 바 있는, 과학혁명 시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데카르트, 파스칼, 갈릴레오, 뉴턴 등의 이 "천재"들은, 18세기의 급진적 무신론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믿음을 합리적 근거에 정초하거나 반대로 믿음을 수단화하되 이 또한 합리적 논거와 논증을 거친 경우에만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이신론(déisme)의 전통을 마련하는데, 푸생의 종교성은 바로 이 전통을 따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갈수록 배경으로서의 자연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그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측면이 강조된다...고 보는 것은 좀 무리인가? 실제로 푸생의 이력을 종교화에서 풍경화로의 이행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푸생의 이른바 풍경화를 보면서 칸트의 숭고 개념을 떠올린 것은 사실이다. 이성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자연 내 불리한 존재조건을 넘어설 줄 아는 것이 인간이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바로 단적으로 크거나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자연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재확인하도록 한다는 것이 칸트 숭고 이론의 대략적 요지. 푸생의 4계절 연작을 처음으로 봤을 때에는 아마도 <판단력비판>을 읽은지 얼마 안 됐었고 그래서 숭고를 떠올렸던 것 같으나, 다시 생각컨대 푸생의 자연관을 숭고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다. 독일과 프랑스라는 차이에 100년 이상의 시대 차이는 물론이고, 100년도 그냥 100년이 아니라 계몽시대를 거쳐 프랑스 대혁명까지를 포함하지 않는가.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를 체화하는 작품으로 흔히 거명되곤 하며 칸트와 동시대인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의 작품과의 비교하면 차이가 좀더 분명해질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과 갈등이라는 구도야 사상적으로는 베이컨을 위시, 17세기부터 이미 널리 퍼져 있던 관점이었을 것인데, 푸생과 그의 시대는 이러한 구도를 받아들임에 있어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모티브에 여전히 갇혀 있지 않았는가 하는.
그러나 이 역시 그다지 진지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좀더 진지할라치면 공부와 사유가 필요하겠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혹은 전시장을 나서며, 당장 떠오른 것이 세르가 푸생에 대해 쓴 글. 그 밖에 관련 주제로는 바로크와 역동론/동역학(dynamisme/dynamique)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들뢰즈의 <주름>에서도 푸생이 언급되고 있던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봤던 유진 그린(Eugene Green)의 영화 <라 사피엔자 (La Sapienza)> 역시 바로크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 ; 참고로 푸생은 1594–1665)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린의 오랜 관심 주제였던 바로크에다가 또 그 특유의 규범적이고 설명적인 스타일이 건축이라는 주제와 접목한 결과로 나온 일종의 바로크 "건축학개론". 이 모든 것을 당장 뒤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참는다. 사실 위에 적은 얘기도 자신이 없고 나중에 보면 마냥 부끄러워질 테지만 그냥 첫인상에 대한 기록 차원에서 남겨둔다.
수미쌍관의 원칙에 입각해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를 하자면... tant pis pour Orphée et merci à ㄴ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