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노 데플레솅의 새 영화, <젊은 날의 세 가지 추억 Trois souvenirs de ma jeunesse>는
요전 에 언급한 바 있는 그의 96년작 <나는 어떻게 싸웠는가 Comment je me suis disputé...>의 시퀄이자 프리퀄이다.
20년 전 철학 박사 논문을 쓰던 폴 데달뤼스는 인류학자가 되어 세계 전역을 떠돌며 살고 있다. 그러다 "다언어 구사자라는 이유로" 외무부 발령을 받고 귀국하는데, 입국 절차를 밟던 중 신분증이 문제가 되어 다소 곤란을 겪게 된다. 이로써 그와 단지 동명이인일 뿐 아니라 국적과 생년월일과 출생지까지 모든 것이 꼭 같은 인물이 실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는 그가 고등학생 시절, 구소비에트로의 수학여행 중에 한 유대인에게 자신의 여권과 비자를 이행함으로써 이스라엘 입국을 도운 사실에 연유한 것(80년대 프랑스에서는 이런 일이 꽤나 있었던 모양이다. 몇 년 전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로써 폴은 지금껏 그 유대인이 자신의 신분을 간직한 채로 살아오다 2년 전에 사망했음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전제. 이를 계기로 폴은 과거를 회상하고, 영화는 그의 플래시백을 프롤로그, 유년 시절, 고교 시절, 청년기, 그리고 에필로그라는 참으로 교과서적인 구성으로 보여준다.
물론 세부로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세부 하나하나가 기가 막히고 어떤 것들은 숨이 막히게 아름다워서 그것이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다. 데플레솅의 작품들은 참으로 섬세해서 다른 장점도 많지만 특히 세부가 전부인 것이 강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강점이 특히 돋보였던 작품이 <나는 어떻게...>였다. 주인공 폴의 책상 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이감을 굳이 숨기지 않은 채 짚어 내려가던 카메라, 몇 달째 소식이 없던 월경이 되돌아 오자 환희에 차 담배를 무는 여주인공 에스테르를 환히 비추던 아침 햇빛 등등. 인물들의 현학적이고 문어체적인 어투가 종종 조소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정도는 유진 그린 같은 노골적 반자연주의에 비하면 준수하고 그렇게까지 과장도 아니다...고 강변하고 싶을 정도로 내가 이 영화와 감독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은 부인키 힘들다.
<세 가지 추억>은 나 같은 팬들에 대한 거의 노골적인 팬서비스였으니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전적인 지지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겠다. 게다가 유년기에서 청년기 사이의 성장담이다 보니 전작을 지배하던 실존적인 무게는 걷히고 훨씬 산뜻하고 자유로운 공기가 영화 전반을 감싸고, 인물들 사이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도 훨씬 누그러진 데다, 무엇보다 싱그러운 십대 배우들이 향수를 자극하는 80년대 의상 및 머리를 하고서 화면을 채우다 보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밝지만은 않다. 전작에서도 다루어진 바, 주인공을 둘러싼 다소 병리적인 관계들은 여기에서도 여전하다. 폭압적이고 혐오의 대상인 엄마, 무기력하고 부재중인 아버지(그러나 이번에는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반면에 지도교수로는 여기에서는 흑인이자 여성인 인류학 교수가 등장, 주인공과는 훨씬 부드럽고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다. 단지 스승이 아니라 엄마의 대리이자 대안적 부모 역할까지. 그리고 에스테르. 폴과 그녀의 관계는 힘겹고 아슬아슬하고 요즘 말로 하면 "밀당"의 지리한 반복이다. 사랑이라기보다는 격정이고, 그래, 정념에 가까운. 그럼에도 이 모든 것에서 과거에 대한 자족적이고 나르시시스틱한 향수라기보단 젊음에 대한 동경과 경이가 지배적으로 느껴진 정서.
그리고 트뤼포에 대한 거의 노골적인 오마주. 로맨티시즘,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찬미 (특히 에스테르 역을 맡은 신인 여배우는 정말로 르느와르 그림의 주인공이 살아난 듯한 외모를 지니기도 했지만 특히 데플레솅의 카메라에서는 더더욱 눈부시다. 전작에서도 칙칙한 남자인물들에 비해 여배우들은 다들 빛이 났었다. 에스테르 역을 맡았던 에마뉴엘 드보에서부터 단역으로 나왔던 앳된 마리옹 코티야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소하게는 전작에서도 나왔던 "영상편지" 장면. 그러니까 에스테르가 폴에게 보낸 편지를 영상화함에서, 보통 같으면 보이스 오프의 내레이션으로 깔고 화면 상으로는 실제 편지라든지 아니면 발송인이나 수신인을 비추는 식으로 연출했을 것을, 그게 아니라 직접 카메라를 향해 편지의 내용을 구두로 읊는 에스테르를 비추는 것이다. 이 영상편지 기법은 트뤼포가 <두 영국여인과 대륙 Deux Anglaises et le continent>에서 쓴 걸로 유명하다. 나는 트뤼포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즐겨 쓰던 이런 영화적 장치들은 너무나 좋아한다. 누벨바그 특유의 기법이기도 했고. 기법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특별한 기술 없이 그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물과 상황을 연출한 것인 뿐임에도, 이렇게 사소한 터치 하나로 사실과 허구, 실제 대상과 표상 사이에 위치한 어떤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공간이 열리고 그곳에서는 또 극중 인물들과 관객의 만남의 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시퀀스는 정말 압권. 플래시백이 끝나고 영화는 다시 현재 40대 폴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외무부에 출근하며 독신 파리지앵의 삶을 영위하던 폴. 그러다 청년기를 함께 했고 에스테르와 삼각관계에 놓이기도 했던 친구 장-피에르의 편지를 받는다. 에스테르 생각이 났는데 혹시 연락처를 알 수 있겠냐는 내용의. 그러던 중 폴은 음악 공연을 보러갔다 바로 그 장-피에르를 우연히 만난다. 부인과 대동한. 부인의 제안으로 셋은 한 잔 하러 가는데, 거기에서 폴은 과거사와 장-피에르가 편지를 보낸 사실을 폭로하며 쌓였던 분노와 배신감 등등을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마티유 아말릭의 배우로서의 진가가 돋보이기는 했지만 보기 힘들었던 장면. 그러다가 화면은 다시 과거의 폴과 에스테르가 사랑을 나누던 침대로 돌아간다. 환한 아침 햇빛을 뒤로 눈부신 몸을 드러낸 채 에스테르가 폴에게 낯선 말로 책을 읽어주는데, 처음에는 무슨 언어인지 몰라 히브리어인가 했더니, 세상에, 희랍어였고, 책은 플라톤이었다. 아마도 <파이드로스>. 바칼로레아도 겨우 통과했을 정도로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어 보였던 그녀가 인류학 전공생인 폴에게 플라톤을 희랍어로 읽어주다니. 거의 "금발의 역전"이랄까. "왜 희랍어를 관뒀니? 잘 하는 것 같은데" 하고 묻는 폴. 이 질문은, 극중 앞서 폴이 지도교수와 처음 대담할 때 희랍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받았던 면박("어떻게 희랍어도 모를 수가 있어? 그러면서 감히 내 지도를 받겠다니!)과 절묘하게 대치된다. 그리고 다시 장면은 전환되고 30년 후의 폴. 아마도 장-피에르 부부와 헤어져서 나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센느 강의 다리를 지나는 그의 머리 위로 웬 종이들이 흩날린다. 한 장을 들어 들여다 보는 폴. 희랍어로 쓰여진 책장들이다. 에스테르가 희랍어는 더 이상 관심 없다면서 폴에게 가지라며 건넨 바로 그 플라톤. 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질과 기억>에서의 베르그손의 구분에 대한 "기억"에 의존해서 써보건대, 이전까지의 플래시백이 그야말로 "추억(souvenir)"이라면, 의도적으로 복기된 것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기억(mémoire)", 자발적으로 환기되는 것이다. 어떤 촉발의 계기들을 통해. 프루스트에게 마들렌느였던 것이 데플레솅에게 와서는 플라톤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조야한 줄 알면서 감히 말해 본다면, 플라톤화된 마들렌느 (Madeleine platonisée). 과거는, 기억은, 그렇게 "있"다. 행복한 것이든, 아픈 것이든 간에. 그리고 어떤 순간에 현전한다. 주로 기대치 않은 순간에. 그러면 어떻게든 맞아야 하는 것이다. 맞거나 아니면 맞서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