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29일 화요일

벼랑

blogin.com · 2004-06-29

왜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서 있었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뒤를 돌아보지 않은 탓이었다. 어깨 너머로 오싹하게 전해오는 싸늘한 공기를 모른척, 자꾸만 모른척 했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자꾸만. 다 틀렸다.

—박쥐

2004년 6월 22일 화요일

논리만큼 좋은 세상

blogin.com · 2004-06-22

니체는 "모든 결정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했던 갈릴레오가 있었기에 근대 과학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참정권을 달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세상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아주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연결사는 논리와는 무관하다. 내가 아는 한 그에 해당하는 논리 기호는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은 대개 그 말이 딛고 있는 체계 내에 설 자리가 없는 종류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체계 내의 다른 문장들과 모순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체제전복적"이다. 그 효과는 "그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집합론에 대해 갖는 것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래서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문장이 기성의 체계 혹은 패러다임에 균열을 내는 걸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이라크전은 잘못된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 결정이 철회돼서는 안 된다.

한국인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은 감행되어야 한다.


그래. 어차피 이 모든 게 논리와는 무관하다. 혹은 ("다수"와 "국익"의 논리에 입각할 때) 논리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혹은 저 전제와 저 결론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정치역학적 전제들이 숨어 있다. 혹은 내 논리 체계와 그들의 논리 체계는 다르다. 혹은 세상이 논리로 다 되는 건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적 부적합성을 지적한다면 분명 그건 자기 모순이 될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만큼은 제발 논리대로 됐으면 좋겠다.


이라크전은 잘못된 전쟁이다.
 그러므로 파병 결정은 철회돼야 한다.

한국인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파병이 감행되어서는 안 된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