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1일 목요일

ㄱ나니?

blogin.com · 2004-11-11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POPE" Alexander. Eloisa to Abelard (extrait)

의 찰리 카우프만이 시나리오를 쓰고 CF 및 M/V 감독 출신인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는,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말해서, 기억에 관한 영화다. 따지고 보면 기억을 다루지 않는 영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운다든지 집어 넣는다든지 뒤섞는다든지 해봤댔자 요즘에 와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로 들릴 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말 많고 탈 많은 인간 관계, 자아, 정체성, 유년 시절의 경험 (그 중에서도 특히 "수치"에 대한 최초의 경험) 등의 문제를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다루는 솜씨가 정말이지 예사롭지 않다. 공드리의 감각적 영상 속에서 카우프만식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는 더욱 빛을 발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두 사람이 만났다 해도 저 정도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했다는 전작 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도 최고였다. 특히 미국식 액센트를 소화하기 위해 발성까지 바꿨음에 분명한 케이트 윈슬렛은 정말 놀랍다. 난 그녀에게 새파랗거나 새빨갛게 물들인 머리카락이나 주홍색 추리닝이나 90년대식 히피 복장 같은 게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 주연으로 물망에 올랐다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대신해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짐 캐리도 우수어리고 간절한 눈빛을 케이지 못지 않게 잘 소화해 냈다. 어느새 몰라보게 커버린 프로도의 모습도 새로웠다. 비록 시리즈는 1편, 그 중에서도 1/3만 본 게 전부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형용사는 "나이스"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가 제목에 사용되고 또 영화 안에서 직접 인용됐는데, 영화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구절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보다는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 "ㄱ나니"는 서태지와아이들의 4집 앨범에 실린 노래 제목이다. 그 노래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ㄱ나지 않는다.

—박쥐

2004년 11월 10일 수요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blogin.com · 2004-11-10

발표 잘 들었습니다. 대통령 선거 후에 벌어진 난리를 피해 이곳까지 오신 걸 환영해요. 질문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상화, 근사, 모델에 관한 논문을 쓰셨더군요. 사실 제가 그 문제를 석사 논문에서 다뤘습니다만,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다 잊었긴 합니다만, 논문 쓰던 당시에는 그 셋이 개념적으로 당최 구분이 안돼서 혼났어요. 이상화(idealization)와 모델도 결국은 근사(approximation)의 한 종류 아닌가요?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개념적 구분이란 게 저한텐 상당히 쥐약입니다만. 특히 요즘 들어선 더 그래요. 난 파르메니데스가 맞았음 좋겠어요.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고. 그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가지가 뻗으면 도대체 구분이 되질 않는다구요. 얘기가 딴 데로 샜습니다만. 어쨌든. 그런가 하면, 질점도 근사고, 뉴턴적 세계관도 근사고, 한국 국민의 평균 키나 평균 몸무게도 근사인데, 뭐 그렇게 넓게 개념화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근데 왜 그렇게 진리값을 부여하지 못해 안달입니까? 루이스의 가능세계론은 상당히 매력적인 도구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진리론에 꿰맞추기 위해 그렇게 도입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쿤도 그래서 자기 입장 설득하느라 고생했잖아요. 인식론적 아나키즘이 뭐 그리 나쁩니까? 사람들이 아나키즘 하면 상대주의에 대해 보이는 것과 비슷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데, 난 아나키즘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반응을 보면 기분이 나빠요. 아나키즘은 "무엇이든 다 좋다"가 아니라구요. 아나키스트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세요? 그들이야말로 신념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먼저 목숨까지 내걸 사람들이라구요. 흑. 그래요. 내가 이래서 요즘 아무말도 못합니다. 도대체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아요. 도대체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한 마디도. 이래봬도 옛날에는 논리학을 꽤 좋아했다구요. 뇌세포 하나 하나를 총가동해서 모든 사고의 과정을 스크리닝한 다음에 답을 얻었을 때 찾아오는, 두뇌가 새하얗게 세탁되는 느낌. 나한텐 그게 정말 지상 최고의 쾌락이었다구요. 한때는. 근데 요즘엔 세계가 정지해 버렸어요. 세상은 미친 속도로 휙휙 돌아가고. 그래서 정말 있을 데가 없어요. 못 찾겠어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더 드리지요. 당신에게도 이럴 때가 있었나요? 난 요즘 건망증이 너무 심해졌어요. 어쩌면 좋죠? 그렇잖아도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요. 이게 정신분열의 초기 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 지하철에서 갑자기 어떤 인종차별주의자가 날 선로로 밀어넣을지도 모르니 그때를 대비한 행동 수칙을 생각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과 비슷한 빈도로.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거 하나 없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니까 웃기죠? 이 블로그, 아무래도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의 전속이었던 이발사가 갔던 그 대나무숲이 돼가나 봐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박쥐 머리는 새대가리.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