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16일 수요일

서른 즈음

blogin.com · 2005-11-16

최근 이곳에서 일어난, 그리고 규모는 약해졌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끝나지는 않은, "소요" 사태는 내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렇게 멀리 있다. 그 동안은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가 날 힘들게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그 거리가 "안전 거리"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논문 심사를 마친 지 한 달이 다 돼 간다. 아직 논문 등록이 남아 있다. 계획서를 본 교수는 "진지하다", 그리고 "하나의 베이스(une base)다" 하고 말했다. "더 깊게 공부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베이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도 못 잤다. 너무 초보적이라는 뜻일까? 나름대로 기초나 근거를 갖추고 있다는 뜻일까?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마디 마디 곱씹고 또 곱씹는 천형을 타고 난 나 같은 이에게 외국어는 형벌이다. 논문을 쓰면서 그들의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얼마나 웃고 울었던가. 그런 걸 보면 외국어가 축복이 되기도 하는구나. 사소한 말들이 기쁨을 주기도 하니까. 교수가 무심코 "다 잘 될 테니 걱정 말아라"라는 말을 던졌을 때 긴장이 해소되면서 몸이 한 순간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환희, 그러니까 카타르시스를 맛보기도 했었던 걸 보면.


어쨌든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러고 보니, 한달 반만 지나면 우리 나이로 서른, 이 새로운 시작을 나이 서른에 맞게 되는 거구나. 늦었다거나 이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런 재미없는 생각들에 시간을 낭비할 틈 없이, 재미있게, 가수 아녜스 빌의 노래 제목(je n'ai pas le temps d'avoir 30 ans)처럼 "서른을 맞을 시간이 없이" 살고 싶을 뿐. 그렇게, 바쁘게. 

more...
... or less


대학 동기들과 꾸린 게시판에 올린 글 중 일부를 옮겨 왔다. 오랜 만에 적다 보니 자연스레 튀어 나오게 된 근황이나 그 밖의 다른 이야기들이 이곳의 독자들에게도 흥미를 주지 않을까 싶어서. "중복"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친구는 없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이번 학기의 첫 수업을 들었다. 얼마 전 다녀 온 콜로키움을 빼면 정말 처음이다. 계절이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었는데 이제서야 기지개를 켜고 있다니, 하고 한심해 하는 한편으로,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이 더 큰 동기를 부여할 지도 모른다고, 늘 그렇게 해오지 않았느냐고 자위하고 있다.

게다가 오귀스트 콩트가 살았던 집, 그가 썼던 서재에서 듣는 데카르트 기하학 강의라니, 동기가 유발되지 않을 리 없다. 교수, 그리고 세 명의 학생들과 한 테이블에서 얼굴을 맞대고 듣는 수업이 청강생인 데다가 그 학교 학생도 아닌 내게 심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콩트의 서재에서라면야. 심지어 오늘은 일찍 도착한 나머지 서재에 꽂힌 그의 저서 초판본들까지 구경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난 촌스럽게도 이런 걸 좋아한다. 욘사마가 앉았던 까페 자리에 앉아 그가 마신 차를 주문해 들면서 행복해 한다는 일본 아줌마들을 난 이해할 수 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콩트에 대해서도 이럴진대, 좋아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오죽하랴.

심사 위원이었던 교수가 "논문을 쓰기로 했다니 기쁘다"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또 한 번의 카타르시스. 그녀가 심사 후 "박사 논문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니 들어가기 전에 잘 생각해 봐라" 하고 얘기했을 때 나는 또 그 말뜻을 헤아리느라 밤잠을 설쳤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서른 타령은 이것으로 끝.

—박쥐

2005년 10월 21일 금요일

Me and you and...

blogin.com · 2005-10-21

난 포스팅을 할 때마다 글자 색깔을 고르는 일에 꽤 신경을 쓰곤 한다. 사진이나 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색을 선별한답시고 나름대로 애를 쓴다는 게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워낙 감각이 없는 터라서 결과에 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 포스트에서만큼은 선택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자신도 있다 : 분홍이 아닌 다른 색깔로 이 영화, 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 (Miranda July, 2004)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감독 자신이 분한 주인공 크리스틴은 비디오/퍼포먼스 아티스트다. 요양원 노인들을 위해 운전 봉사를 하기도 하는데, 그곳서 사귄 할아버지와 함께 백화점 구두 매장에 갔다가 매장 직원인 리처드를 만난다. 리처드는 한달 전부터 부인과 별거에 들어간 뒤 아들 둘과 살고 있는데,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부인과의 "이별"을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의 왼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던 탓이다. 그것도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크리스틴은 "발에 맞지 않는 구두 때문에 고생하기에 당신은 너무 고귀한 사람"이라며 혹하게 만들어 결국 예정에 없던 신발을 구매하게 만든 리처드에게 호감을 느껴 그 이후에도 계속 그가 있는 매장의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겠다시피, 해피엔드.

물론 두 주인공 간의 우연한 만남-갈등-갈등 해소가 전부는 아니다.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리처드의 두 아들들, 리처드의 직장 동료, 리처드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10대 소녀들, 이웃집 소녀, 크리스틴의 친구인 할아버지와 그의 애인 등등. 심지어 이웃집 소녀가 어항 가게에서 산 금붕어까지. 크리스틴을 별 볼일 없는 풋내기 작가로 생각하고 냉대했던 미술관 큐레이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주인공이나 다른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웃집 소녀와 더불어 내면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를 포함, 이 모든 조연들은, 주인공들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발한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외롭고 섬세하고 상처입기 쉬운 영혼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상처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도록 면역력을 키우는 것. 그렇지만 그들은 항체를 만들만한 힘조차 없이 한없이 약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입은 상처는 서로서로 보듬는 것이다. ))〈〉((, 이렇게 말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없이 따뜻하다. 거창한 인류애나 쓸데없는 동정이나 연민, 혹은 가족주의/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말끔하게 싹 걷어낸,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런데 그 시선은 무턱대고 따뜻하지 않다. 감독 역시 그런 그들을 냉정하거나 우월감 혹은 동정심에 젖어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여리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큰 매력이다. 그래서 소박하게 착하기만 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이 착하기 짝이 없는 영화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내 미적 감각을 신뢰할 수 없긴 하지만. 어여쁜 감독 언니로 인해 호감도가 상승했음을 부인하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74년생(!)인 그녀는 팔방미인, 이 단어의 모든 내포/외연을 스스로 체현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정받는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단편집 출간을 앞두고 있기도 한 소설가인가 하면, 영화는 또 영화대로, 이 첫 작품으로 꺈느, 선댄스를 비롯, 상도 여러 개 받았으니. 그 뿐인가? 그녀와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틴 사이에는 한 치의 거리도 없을 것임에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녀는 성격마저 좋은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니, 세상이 불공평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인물 리스트에 그녀를 추가할 수밖에.

))<>((
forever



1. 음악도 좋다. 특히 코디 체스트넛의 노래. http://elginpark.com/meandy ... usite1.html>여기 에 가면 들을 수 있다.

2. 위의 그림은 영화 홈피에 소개된 공식 포스터 중 하난데, 최종적으로는 선택되지 않은 것 같다. 난 시중에 나와 있는 것보다는 이게 맘에 든다. 샛분홍에 딱 저 이모티콘과 "포에버"만 찍혀 있는 영화 포스터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3. 줄라이의 http://meandyou.typepad.com/>블로그 에 가니 그녀가 시사회를 위해 파리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이 있었다. 난 그 사진에서 배경으로 쓰인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다른 극장에서 볼까 하다가 그곳으로 간 거였는데. 그렇다. 이것은 자랑이다. 그 누구도 자랑이라고 생각지 않겠지만.

4. 줄라이가 시나리오를 쓴 다음 영화의 제목은 "Are You the Favorite Person of Anybody ?"란다. 긴 제목을 좋아하나 보다. 어쨌든 제목 예쁘다. 이번 것도 그랬고.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