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는 말이 make sense 하는 건지, 한다 해도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말 누구나 다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 의지할 대상을 구하고 싶고, 기왕 의지할 거면 그 대상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그리하여 이 세상을 초월해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는, 그런 때 말야.
나도 그랬고, 그럴 때 성당에 간 적도 있지. 일요일마다 가끔, 심지어 이번 일요일에도 그럴 하는 생각을 했었어. 가서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 눈으로 꽤 볼 만한 성당 건축물이나 장식물을 즐기고, 또 귀로는 꽤 들을 만한 음악을 생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안정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기도 하더라고. 쉽게 오는 만큼 쉽게 사라지기도 해서 문제지만.
안정의 수단을 꼭 종교에서 찾을 필요는, 또 그 종교가 기독교만큼 "초월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나한테 성당은 미술관이나 영화관 가는 일이랑 똑같거든. 이렇게 심미적인 쾌를 제공하고, 이것을 다시 "전통"으로 남기는 것만으로 기독교, 적어도 천주교는 자신의 사명을 충분히 한 것이고, 적어도 이것만으로도 내겐 존재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어. 이건 순전히 기독교가 이곳에서 오랜 역사와 권력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과정이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나는 어쨌든 그 덕에 위안을 얻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만 종교에서 그 이상을 구할 수 있을까? 삶의 지침이나, 살아갈 이유, 심지어 원동력이나 동기 같은 것까지. 나 역시, 착한 행동이나 가상한 노력 등등은 언젠가 보상을 받고,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대가를 치루게 된다, 등의 비합리적인 믿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게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알다시피 신이나 혹은 다른 자연 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정말 각 인간들에게 고유한 '자유의지'란 게 있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 하난데, 이건 도대체 판결이 날 수 없는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야. 각자가 가진 신념에 따라, 혹은 입맛에 따라, 맞는 걸 선택하고 그걸 "믿고"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히려 아까 말한 지침, 이유, 원동력, 동기 등등은, 내 경우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 같아. 내가 의지로 부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참 이상한 일이지? 이번에 내게 이 모든 걸 선사한 건 너였어. 지난 토요일 너와의 통화 이후, 정말 거짓말처럼, 정신과 열정을 되찾았어. 내가 네게 비슷한 선물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마도 지금쯤이면 넌, 발표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해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성공적인 발표라는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바야흐로 여름. 바캉스를 맞은 파리는, 원래는 '공백'을 뜻했던 '바캉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하철, 버스, 백화점, 거리, 까페, 그 어디고 할 것 없이 외지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들을 보면서,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의 틈 안에서 또는 그들과 시선을 나란히 하면서 (그들에 대해 뭇 파리지엥들마냥 철저히 "관찰자 시점"을 취하기란 내게 언제까지나 불가능한, 또는 경계해야 할 일이리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과, 이곳에서 7년째 살고 있는 이상 완전히 외지인인 그들과는 그래도 좀 다르리라는, 야릇하고 알량한 우월감이 내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가끔 로메르를 떠올리며 혼자 웃곤 한다.
이 모든 것이 아마도 로메르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여름의 파리는 미리 준비를 하지 못했거나 동행을 찾지 못해 휴가를 떠나지 못한 한심한 사람들이나 남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처음에 세웠던 휴가 계획이 좌절되자 망연자실해 하던 [녹색광선 Le rayon vert]의 델핀을 생각해 보라). 파리지엥이 아니라 해도 여름을 파리에서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해도 잘 들지 않는 데다가 툭하면 비가 오기 일쑤고, 바다나 그 밖의 "자연"을 만끽할 만한 공간이 거의 없거나 한없이 부족하고, 아무래도 도시적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메르가 여름을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녹색광선] 외에도 [남자 수집가(?) La collectionneuse], [클레르의 무릎 Le genou de Claire], [해변의 폴린 Pauline à la plage], [여름 이야기 Conte d'été] 등이 "피서지에서 생긴 일"을 그리고 있다. 여름 휴가 기간 동안 벌어진 사건이 주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친구의 친구 L'ami de mon amie]나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도 빼놓을 수 없겠다.
왜 휴가지인가? 로메르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각자 고유한 삶의 원칙과 태도를 가지고 이를 완강히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답답해 할 정도로. [겨울 이야기]의 펠리시는 소식이 끊겼으며 재회 가능성이 그야말로 백만 분의 1인 옛 애인--이자 딸아이의 아빠--을 5년 째 기다리고 있고, [해변의 폴린]의 폴린은 주변 어른들의 애정 행각(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녹색광선]의 델핀은 자신이 바라는 "꿈의 휴가"를 위해 계속해서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자신의 운명을 틀어쥐고 그것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그들이 적어도 휴가지에서만큼은, 아니 오직 휴가지에서만, 운명(destin)의 힘이 아닌 우연(hasard)의 힘에 이끌린다. 평상시 그들의 삶에 우연의 여신이 개입할 여지는 극히 적다. 여신으로서는 그들이 낯선 곳에 떨어져서 잠시 긴장을 늦춘 사이, 바로 그 틈을 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한 번 잡은 이상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쉽지 않게 잡은 만큼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우연의 여신들이 대부분 선하며 늘 친절만을 베푼다는 사실이다. 펠리시는 옛 애인을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고, 델핀은 마침내 '우연'히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나 최고의 휴가를 만끽한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냐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 작위성은 적어도 로메르 세계 안에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그가 독실한 천주교도인 동시에 파스칼의 충실한 독자였다는 사실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사실 이 둘은 차치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그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특히 파스칼은 영화에서 두 번, 희곡에서 한 번 총 세 번씩이나 직접 인용된다), 나는 이것이 작가의 자의식이 근본적으로 허구라는 속성을 지닌 영화라는 장치 안에서 여러 겹에 걸쳐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로메르 특집호)의 한 필자가 지적했듯, 작가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인물로는 [겨울 이야기]의 로익을 꼽을 수 있다. 로익은 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사서로 근무 중인, 펠리시의 표현에 따르면 너무 "앵텔로"한, 즉 먹물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물이다. 게다가 카톨릭.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나 영혼의 불멸/부활 등의 카톨릭 교리들을 "신화"로 치부하면서 믿지 않는다. 반면 펠리시는 기존의 종교가 아닌,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확고한 "믿음"(펠리시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내밀한 확신conviction intime")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로익은 말한다. "내가 신이라면 너를 특별히 귀애할 거야. 왜냐하면 너는 부당하게 [옛 애인의 소식두절이라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바로 이거다. 그(로익-로메르)는 천주교도이나 그저 소박하게 믿음을 가지고 살기에는 너무 회의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런 그에게, 비현실적으로 비칠지언정, 그 어느 종교적 또는 지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그녀(펠리시-다른 수많은 로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들은 경이의 대상이다. 만약 실재했더라면 그녀들 대부분이 현실 속에서 부당하게 고통을 당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그녀들에게, 그는 작품 내에서의 창조주라는 위치를 이용해 축복을 베푼다.
초기를 제외하고, 특히 여성이 로메르 세계의 중심에 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주체/주관으로서의 '그'와 객체/대상으로서의 '그녀'의 분리가 두드러진다. 첫 장편 [사자 자리 Signe de lion]에서부터 [오후의 사랑 L'amour, l'après-midi] 까지) 까지의 '그'들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이념/이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녀'들 못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감독이 '그'들에게 보내는 시선이 그'녀'들에 대한 것만큼 애정에 넘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몹시 자조적이고 냉소적이다. 이들에 대한 우연의 여신의 역할 또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반면에 '그녀'들은 그런 '그'들에게서 속물의 탈을 걷어내고 남은, '순수'한 관념론자/이상주의자들의 현현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로메르가 되고 싶어했던 그 무엇이다.
위의 클립, "춤추는 로메르"에서 우리는 이상주의자로서의 그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누릴 수 있다(비단 이상주의자로서가 아니라 '인간' 로메르가 가시화된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카메라에 자신을 노출하는 일을 극도로 꺼렸다. 남아있는 그의 인터뷰는 서면이나 라디오 녹화가 대부분이다). [녹색광선]에서 그는 진짜 '녹색광선'을 찍고 싶어했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 드문 현상을 카메라에 담는 데에 성공하지만, 필름에 찍혀 나온 결과를 보고 적잖이 실망한다. 그가 쓰던 "원시적"인 장비들과 좋지 않은 필름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일. 결국 그는 최종 편집본에 초록색을 덧칠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영화의 마지막 샷에서 다소 작위적인 초록빛 선을 보게 된 이유다.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던 로메르는 10년 후 [여름 이야기]를 찍으면서 다시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며칠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최후의 시도를 마친 후, 포기를 선언한 날, 마침 있었던 나이트 클럽에서의 촬영을 마친 그는 무대에 올라 미친듯이 춤을 춘다. 젊은이들 틈에서, 젊은이들이 듣는 댄스 음악에 맞춰서. 그의 면면--지극히 고전적인 예술 취향, 수줍고 조심스러운 태도 등--을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이었는지 알 것이다. 그리고 가늠해 보리라. 그에게 녹색광선이 어떤 의미였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