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2년 전 이맘 때

blogin.com · 2010-10-29



꼭 2년 전, 10월의 마지막 사흘 동안이었다. 스위스 베른과 로잔으로 혼자 떠난 것은. 베른은 아인슈타인이 밀레바와 결혼해서 애를 키우고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솔로빈, 베소 등의 친구들과 "올림피아"라는 이름의 서클을 만들어 세미나를 하면서 살던 중, 마침내 물리학을 뒤흔든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가장 젊고 빛나는 시절을 보낸 바로 그 도시. 로잔은... 부끄럼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당시 그곳서 유학하고 있던 루시드폴의 "발자취"를 느껴보겠다는 명목으로 무작정 목적지로 집어넣었으나, 그보다 내 인상에 깊이 각인된 것은, 드넓은 호수, 그 뒤로 펼쳐진 알프스 산, 호숫가에서 갈매기와 오리와 백조가 한 데 어울린 광경, 생각보다 큰--이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도시 규모, 말끔하고 안정돼 보이는 공원이며 주택가, 중심의 교회를 빙 둘러싸고 골목마다 가게들이 언덕을 덮은 도심, 무엇보다, 개관 70주년을 맞아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Top Hat 을 무료 상영하던 영화관, 상영 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며 수줍게 인사했던 영화관 주인 할머니 등등이었다.

충동적이요 즉흥적으로 감행한 여행. 이런 여행을 그 이후로는 해 본 기억이 없다. 충동적이거나 즉흥적이되 사람들과 함께였거나, 아님 홀로이되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떠났거나. 그러고 보니 스위스 때도 나름 이것저것 계획을 많이 세우긴 한 것 같은데... 아무리 해도 좀처럼 늘지 않는 여행 실력과 도대체 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삶 전반에 관한 내 특유의 어리어리함 덕분(?)에, 유럽의 고도들은 모름지기 복잡하고 좁은 옛 골목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야 제맛, 이라는 내 원칙은 충분히 고수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어떨까?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갑자기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해야 할--정확하게는 해놨어야 할-- 일들을, 미루고 미뤄둔 것도 모자라 닥치기로 하면서도 전혀 능률 없이 하고 있는 통에, 하루에도 몇 번씩, 백석의 "북관의 계집"이 떠오를 만큼 절망스러운 이 상황에.

—박쥐

2010년 9월 14일 화요일

교회에 나갈까 고민하는 친구에게

blogin.com · 2010-09-14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는 말이 make sense 하는 건지, 한다 해도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말 누구나 다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 의지할 대상을 구하고 싶고, 기왕 의지할 거면 그 대상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그리하여 이 세상을 초월해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는, 그런 때 말야.

나도 그랬고, 그럴 때 성당에 간 적도 있지. 일요일마다 가끔, 심지어 이번 일요일에도 그럴 하는 생각을 했었어. 가서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 눈으로 꽤 볼 만한 성당 건축물이나 장식물을 즐기고, 또 귀로는 꽤 들을 만한 음악을 생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안정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기도 하더라고. 쉽게 오는 만큼 쉽게 사라지기도 해서 문제지만.

안정의 수단을 꼭 종교에서 찾을 필요는, 또 그 종교가 기독교만큼 "초월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나한테 성당은 미술관이나 영화관 가는 일이랑 똑같거든. 이렇게 심미적인 쾌를 제공하고, 이것을 다시 "전통"으로 남기는 것만으로 기독교, 적어도 천주교는 자신의 사명을 충분히 한 것이고, 적어도 이것만으로도 내겐 존재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어. 이건 순전히 기독교가 이곳에서 오랜 역사와 권력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과정이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나는 어쨌든 그 덕에 위안을 얻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만 종교에서 그 이상을 구할 수 있을까? 삶의 지침이나, 살아갈 이유, 심지어 원동력이나 동기 같은 것까지. 나 역시, 착한 행동이나 가상한 노력 등등은 언젠가 보상을 받고,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대가를 치루게 된다, 등의 비합리적인 믿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게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알다시피 신이나 혹은 다른 자연 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정말 각 인간들에게 고유한 '자유의지'란 게 있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 하난데, 이건 도대체 판결이 날 수 없는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야. 각자가 가진 신념에 따라, 혹은 입맛에 따라, 맞는 걸 선택하고 그걸 "믿고"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히려 아까 말한 지침, 이유, 원동력, 동기 등등은, 내 경우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 같아. 내가 의지로 부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참 이상한 일이지? 이번에 내게 이 모든 걸 선사한 건 너였어. 지난 토요일 너와의 통화 이후, 정말 거짓말처럼, 정신과 열정을 되찾았어. 내가 네게 비슷한 선물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마도 지금쯤이면 넌, 발표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해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성공적인 발표라는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내 보잘 것 없는 믿음이 "마법" 가루가 되어 대서양을 건너 네게 뿌려지기를.

파리에서 지선.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