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2일 금요일

카우프만과 니체

blogin.com · 2004-11-12

* Eternal Sunshine... 에서 커스틴 던스트가 맡은 메리는 바트렛 명언집의 구절들을 외우고 다니는데, 그녀가 인용한 것이 포프의 시와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다. 다음은 http://www.imdb.com/title/tt0338013/quotes>http://www.imdb.com/title/tt0338013/quotes 에 가보세요.

근데 이 영화, 생각해 보면 볼수록 재밌군요. 특히 철학하는 사람들은 영화의 구석구석에서 재밌는 요소들을 한 바가지 찾아낼 것 같습니다 (뭐, 문학하는 분들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전설적 로맨스에 대한 영화적 해석이라고 좋아하실 수도). 우선 기억이나 정체성과 같은 고전적인 철학 주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구요. "나는 너다", "그가 나의 아이덴티티를 훔치고 있다"와 같은 대사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철학 수업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만큼이나 자주 인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밖에도, 예를 들어 니체의 이 구절은 영화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되는데요, 전 그걸 보면서 영문판 니체전집의 편집자인 카우프만과 시나리오를 쓴 찰리 카우프만이 어떤 관계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더랬지요. 뭐 그건 사소한 부분이고, 굳이 니체가 언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핵심어인 "망각"이 니체 전공자들의 흥미를 끌지 않았을까 해요. 한 영화 포럼을 봤더니, 실제로 니체로 논문을 쓰는 철학 강사가 수업 시간에 이 영화를 가지고 니체에게 있어서의 "망각"을 설명했다고 해요. 초인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의 능동적 망각,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의 범인/일상인(니체가 현대인을 가리켜 부르는 용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요?)의 전유물인, 과거의 향수에 갇힌, 의지가 결여돼 있는 수동적 망각. 이 강사는 후자의 예로 아멜리를 들었다네요. 헉.

어쨌든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어요.

—박쥐

2004년 11월 11일 목요일

ㄱ나니?

blogin.com · 2004-11-11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POPE" Alexander. Eloisa to Abelard (extrait)

의 찰리 카우프만이 시나리오를 쓰고 CF 및 M/V 감독 출신인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는,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말해서, 기억에 관한 영화다. 따지고 보면 기억을 다루지 않는 영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운다든지 집어 넣는다든지 뒤섞는다든지 해봤댔자 요즘에 와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로 들릴 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말 많고 탈 많은 인간 관계, 자아, 정체성, 유년 시절의 경험 (그 중에서도 특히 "수치"에 대한 최초의 경험) 등의 문제를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다루는 솜씨가 정말이지 예사롭지 않다. 공드리의 감각적 영상 속에서 카우프만식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는 더욱 빛을 발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두 사람이 만났다 해도 저 정도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했다는 전작 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도 최고였다. 특히 미국식 액센트를 소화하기 위해 발성까지 바꿨음에 분명한 케이트 윈슬렛은 정말 놀랍다. 난 그녀에게 새파랗거나 새빨갛게 물들인 머리카락이나 주홍색 추리닝이나 90년대식 히피 복장 같은 게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 주연으로 물망에 올랐다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대신해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짐 캐리도 우수어리고 간절한 눈빛을 케이지 못지 않게 잘 소화해 냈다. 어느새 몰라보게 커버린 프로도의 모습도 새로웠다. 비록 시리즈는 1편, 그 중에서도 1/3만 본 게 전부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형용사는 "나이스"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가 제목에 사용되고 또 영화 안에서 직접 인용됐는데, 영화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구절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보다는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 "ㄱ나니"는 서태지와아이들의 4집 앨범에 실린 노래 제목이다. 그 노래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ㄱ나지 않는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