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이건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관점에서 하는 얘깁니다."
O'
"종이나 철 등등은 다 중국에서 건너온 겁니다. 과학 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과학은 중국의 그것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낙후돼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의 과학은 산업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오늘의 차이를 만든 겁니다. 한편으로 과학이 늘 같은 방식으로 전파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프리카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죠. 선진 학문이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다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죠."
O''
"영미권의 천문학사 연구는 아랍의 영향을 깡그리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랍을 빼놓고서 코페르니쿠스 이전 중세까지의 천문학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중국의 천문학은 서양의 중세 이전부터 고도로 발달돼 왔던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쪽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내가 아는 서양과 아랍 천문학에 대해서만 얘기할 겁니다."
똑같이 미운 사람들인데, 아예 생각 없는 부시보다 알 것 다 아는 블레어가 더 미울 때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지도. "내가 하는 말이 무조건 진리야! 그러니 그저 잠자코 들어!"나 "내가 하는 얘기, 다 내가 가진 특권적 위치에서 하는 말이니까, 그걸 새기면서 들어요"나 똑같이 강압적일 수 있는데(대개의 경우, 이렇게 시작하는 종류의 대사-주장은 발화되는 즉시 상대방에게 관철되게 마련이다. 일단 화자와 청자 사이의 일방적인/위계적인 관계가 상정되면서 그 모든 얘기들이 시작되는 거니까), 전자의 경우 대들고 싶은 의지를 샘솟게 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그런 의지를 스르르 녹여버린다. 소수자/낙오자 정서를 가진 사람이 후자같은 말을 들으면 갑자기 적이 동지로 느껴지면서 전의 및 전투력이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아, 이게 웬 뚱딴지같은 군사주의 메타포란 말인가!).
문제의 근본은 그런 말들일수록 실제로는 반성하지도 않았으면서 온갖 반성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음을 숨기기 위한 것일 확률이 높다는 데 있다. 플라시보 효과를 노린 투명한 방어막일 혐의가 짙다는 거다. 유럽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교묘하게 포장한 저 O', O''를 보라! 자기 반성 O가 결국 화려한 포장지였다는 얘기다.
애써 반성하려는 이 앞에다가 두고 자기 반성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느니 어쩐다느니 거품을 물며 되지도 않는 설교를 늘어놓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전혀. 그래도 관대한 그/그녀는, 다 자격지심이 터질듯 부풀어 올라 있고 괜한 일들에 쓸데없이 예민해져 있는 탓이려니 하고 이해해 주리라. 더군다나 난 요즘 정체--국적, 인종, 성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요약+정리해주는 외모!-- 때문에 한참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지 않은가.
사실 정작 반성이 필요한 건 나다. 오늘도 주느비예브에서 인종별 분포도를 머릿 속으로 계산하고 있지 않았느냐. 아랍 사람이 스쳐 지나갔을 때 가방 속에서 지갑을 확인한 건 또 어떻고. 어쩜 난, 그들이 세련된 방식으로 반성하는 걸, 반성하는 자기의 위치를 저토록 자신있게 드러내는 걸, 질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들은 이미 자신들의 모든 것을 선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정도로 나를 포함한 타자들의 무의식을 잠식해 버린 것이다. 저들 아닌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자신들에 대해 반성하는 바로 그 모습조차 타인들로부터의 부러움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은근하고 아주 깊숙하게.
결론. 별 수 없다면, 생긴대로 살자. 단, 어떻게든 "수" 찾는 일을 포기하지 말자. 그걸 오로지 혼자서 찾겠다는 생각은 버리자.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