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30일 금요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blogin.com · 2004-04-30

정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그런데 할 수가 없다. 이공계 위기론을 얘기하면서 교수가 "요즘 라보(여기서는 연구실/실험실을 "랩"이라고 하지 않고 "라보라투아 laboratoire"를 줄여 "라보"라고 한다. 이런 식의 줄임말들--사전에 절대 나오지 않는, 심지어 "은어/속어" 사전에도 나올까 말까 한, 학생들/교수들/연구원들 사이의 은어들--을 익히는 데에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들을 봐라. 동양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순수한 프랑스 애들은 이공계에 가려 하지 않는다. 이게 다 국가적 지원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냐" 하고 말했을 때, 그리고 한 학생이 "맞아요. 내가 있던 라보에도 일본, 중국, 한국에서 온 애들이 득시글했어요" 하고 맞장구쳤을 때, 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말을 하더라도 하고 싶은만큼 하지는 못한다. 교수가 소논문 주제에 대해 얘기해보라고 했을 때, 난 오래 전부터 고민해 왔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뉴턴/라이프니츠 - 무한소를 중심으로 한 무한 및 연속성 개념 - 근대적 시,공간 및 운동 개념 - 자연의 수학화가 그것이었다. 사실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자료도 꽤 많이 찾아 모았었고, 그리고 이곳에 와서 수업 등등을 통해 그 중요성과 심각성에 확신을 얻기도 했던 터였다. 그런데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고, 결국 다른 주제를 택해야 했다.

심지어, 하고 싶었던대로는 고사하고, 하고자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말을 내뱉기도 한다. 교수가 17, 18, 19 세기 과학사의 특징에 대해 말해보라고 했을 때, 난 너무도 간단하게 "글쎄요, 특별한 차이는 잘 모르겠는데, 보통 사람들은 17세기 과학 혁명기의 수학/물리학에서의 성과들을 18세기에 정립/확립해 나갔다면, 19세기에는 그러한 성과들을 수학/물리학이 아닌 다른 학문들과 다른 산업에 적용했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잘..."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교수는 "그래요, 보통 그렇게들 얘기하는데, 아니죠. 거기에 의문을 가지는 게 당연해요." 하고 말해주었다. 아! 내가 원래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는데. 평소엔 그런 식으로 확 싸잡아서 말하는 걸 제일 경계하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했었는데. 질문 자체가 무리가 있었음을, 과학사에 대한 접근에서만큼은 그렇게 거시적이고 일반적인 시대 구분이 무익함을 좀더 강조하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말했어야 했는데, 난 그만 그런 식의 통상적인 구분만을 길게 풀어 놓고 만 것이다.

내가 모국어로 말하고 쓸 때도 말보다는 글을 더 편안하게 느끼고, 그래서 전화 통화보다는 채팅을, 채팅보다는 이메일 주고 받기를, 이메일보다는 어디에든 혼자 끄적이는 일을 선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 와서 살다보니 그 말과 글 사이의 간극이 더 커졌고, 그 간극은 날로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말과 글을 포함하는 언어와 사고 사이에도 균열이 생겨나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혹은 거리를 걸으면서, 수업을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그 모든 생각들을 어떻게든 담아두고, 그것들을 집에 들어오자마자 포스팅하려 애썼던 것은 이를 막아 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블로깅 중독은, 이러저러한 고립무원의, 언어도단의, 유구무언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고, 어쩌면 생존 전략이었다. 

정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내 머릿 속을 스치고는 그냥 새처럼 달아나버리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 싶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프랑스 과학사/인식론에 대해서, 이곳에 와서 (재)발견한, 과학혁명기 이후 18세기의 놀랍도록 풍부한 과학사적/철학사적 사실들에 대하여, 콩트나 헤겔의 과학철학사적 가치에 대해, 프랑스 칸트 철학 연구의 특수성에 관해, 앙리 푸앵카레, 피에르 뒤엠, 장 투생 드장티, 자크 메를로-퐁티 등 숨은 보석같은 과학철학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헌책 시장, (헌)책방, 라디오, 보험, 도서관, 음악, 영화, 음식 등 살면서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행복하게 부딪치게 되는 것들에 관해서도.

그런데 이렇게 멍석이 깔려 있는데도, 도대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예전엔 말을 제대로 못하는 거나 생각을 맘껏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순전히 성격 탓이라고 나름대로 자위했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말" 때문이 아니었던 거다. 생각을 깊이 하지 못하고 사고를 논리적으로 하지 못한 탓이었던 거다. 애꿎은 연장 탓만 하는 실력 없는 목수처럼. 철학도로서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설명을 못하겠어" 하고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니.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이다.

—박쥐

2004년 4월 28일 수요일

그가 피를 부른 이유

blogin.com · 2004-04-28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은 피로 붉게 도색된 영화다. 나는 사람의 피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피투성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감독은 어떻게 하면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피를 가장 잘 형상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이 연구했음에 틀림 없다. 영화의 모든 장치가, 심지어 배우들까지도, 오로지 피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쓰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보색 대비다. 핏빛의 피사체는 배경이 초록색일 때 가장 돋보인다는 것이 중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배운 정설이고 또 광학에서도 입증된 사실인데, 이 영화를 보니 그 정설/사실이 비로소 진실처럼 느껴진다. 그 진실은 "징그러운"과 "싱그러운"라는, 각각 적색과 녹색에 대해 흔히 붙는 형용사 사이의 차이에 있다. "님"과 "남"이 겨우 점 하나 차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엄청난 간극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초록빛 냇물이 찢긴 아킬레스건에서 흘러나온 피로 검푸르게 물드는가 하면, 머리카락을 아주 밝은 청록색으로 물들인 신하균의 손끝에서는 붉은 핏줄기가 쉴새없이 뿜어져 나온다.

물론 영화에서 피를 비추는 방식에 관한 한 정석이라 할 만한 것은 따로 있고, 박찬욱도 이를 무시하지 않는다. 핏빛으로 긴장감이나 공포감을 조성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새하얀 천을 피로 적시는 것일 게다. 물론 B급 영화 매니아라는 박찬욱 감독은 피가 철철 흘러 넘치는 영화들을 싫증날 만큼 봤을 터이고, 그런만큼 그러한 클리셰를 그대로 가져다 썼을 리 만무하다. 기억나는 것은 배를 움켜쥔 신하균의 손가락 사이로 핏방울이 새어나와 하얀 운동화 위로 뚝 떨어지는 장면 정도.

그런데 영화에서 피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러한 시각적 효과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피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미묘한 대비들 때문이기도 했다. 피와 물, 피와 오줌 또는 다른 배설물 등등이 그것이다. 영화 속 남자들--신하균, 송강호, 장기 브로커, 짜장면 배달부--은 대부분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반면, 여자들은 물에 빠지거나--송강호의 딸, 신하균의 누나-- 피가 아닌 다른 체액(오줌)을 쏟아내고--배두나-- 죽는다. 그런가 하면 송강호에게 강제 해고를 당한 뒤 가족과 한꺼번에 자살한 노동자의 입가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뱉어낸 토사물이 묻어 있다. 여자-물과 관련해서라면 또 다른 정교한, 어쩌면 진부할 지도 모를 분석이 필요하겠으나, 그녀들의 물이나 노동자의 비소섞인 토사물이 피만큼이나 진한 것만은 틀림없다. 이쯤 되면, 전자가 후자에 "대비"된다기보다 후자 덕에 전자가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고 해야겠다.

그렇다면 왜 피일까? 나는 혁명이라는, 이제는 너무 낡았거나 아니면 너무 흔해진 말을 떠올렸다. 혁명이 피를 필요로 하던 시대는 지났다고들 한다. 이 말은 (1) 더 이상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2) 혁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언뜻 보면 박찬욱은 (1)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 "혁명"을 운운하는 배두나는 그다지 결연하지 않은 자세로, 아니 시시껄렁한 태도로 "재벌 해체, 미군 축출"를 침뱉듯이 말하면서 "찌라시"나 뿌리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가 속해 있는 "혁명적 무정부주의 그룹"은 외견상 공공의 적을 처단하는 테러리스트라기보다는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을 대변하는 조폭에 가깝다. 그런 만큼 '혁명'은 이제 사어에 가까운 말이 됐고, 또 '피'와는 아주 멀어지게 된 것이다.

혁명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면, 그것은 (2)에 한해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의 혁명은 너무나 흔해빠진 말이 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에서처럼, 피를 흘리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흘린 피를 유의미하게 만들 유일한 통로인 "혁명"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피는 그저 죽어가는 자가 마지막으로 쏟아낸 배설물일 따름이다. 그/그녀가, 비록 입으로 혁명을 말하지 않았을 지 몰라도, 자신의 온 삶과 온 몸으로, 혁명이 당위적임을, 필요함을, 절실함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찬욱은 단순히 피튀기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이, 그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자신의 "약자에 대한 감수성"에 알량한 자기 만족을 느끼거나 혁명에 얽힌 트라우마를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하려는 이들과 차별화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식으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박찬욱의 "순수했을" 지도 모를 의도를 오도하려는 것은, 그가 그저 뒷걸음치다가 우연히 똥을 밟듯이 저 모든 것을 쏟아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어떤 막연한 추측 혹은 기대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영화 전체를 도배하고 있는, 사람 몸에서 흘러나온 그 많은 찐득찐득한 액체들이 내 가슴 속에 이토록 진하게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