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8일 토요일

인물 인지과학사 : 데니얼 데닛

blogin.com · 2004-05-08

밉살스러운,
그렇지만 미워할 수 없는 철학
데니얼 데닛의 인지과학에 대한 감상


철학이 미울 수도 있냐고? 그렇다, 적어도 내겐. 난 독단론이나 교조주의의 낌새가 보이는 철학이 밉다. 겉으로 보기에 무척이나 객관이나 관용을 추구하면서 사실상 자기 외의 다른 사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철학은 더 밉다. 내가 기계론과 과학주의와 물리주의를 비롯해서 그리고 그에 기반한 일부 영미권 분석철학이나 개신교의 원리주의나 신자유주의 등등을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인지과학을, 아주 단순하고도 무식하게,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보고 인간의 사고와 인식이라는 행위를 특정 세포의 기계적 메커니즘에 의한 "물리적 과정"로 환원하려는 기획으로 이해했을 때, 그에 대해 호오를 말하기란 쉽지 않다.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건 분명한데, 마냥 소원하게 지내기는 아쉽고 찜찜한 데다가 아주 가끔씩은 곁에 두고싶기까지 한 이성친구 같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경원지심이다.

정신분석학을 "사변적 심리학"이라고 경멸하는 데서 보듯이 다소 교조의 냄새가 풍기긴 해도, 그들은 겸손한 편이다. 물리주의를 옹호하는 대표적 심리철학자인 김재권도 "인지과학이 모든 걸 설명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의 말에는 "아직까지는 아니다"라는 단서가 붙어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과학이 지금까지 밝혀낸 한도 내로 제한한다.

이들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기존의 철학사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서 소스를 구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뭇 현대 철학자들이 뉴턴 물리학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그에 기반해서 나온 당대 철학들을 낡아빠진 것으로 치부하는 반면에(모든 철학이 그 시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나온 것인만큼, 현재의 효용 가치를 묻기 전에 역사적 배경 위에 위치시켜 놓고 봐야 하는 것이거늘!), 일부 인지과학자들은, 멀게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가깝게는 괴델 등 과거 철학자들의 인식론적 테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삼아 그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긴, 인지과학의 물음 자체가, 심신 관계를 비롯해서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진 서구 철학의 근본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던가.

사실 인지과학은 현대 과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혹은 형성해 가고 있는 다른 분야--생명공학/분자생물학, 나노과학, 인공지능/로봇공학 등--에 비해 사회적 비판의 성역 내에서 보다 안전한 위치에 있는 편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세 분야와 꽤 밀접하게 연관돼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역사도 짧고 또 "순수" 학문에 머물러 있어 시장에의 의존도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이 미미하기 때문인 듯하다. 거기에다 윤리적 문제에서도 자유로운 편이다. 회의론 역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인 "사고"가 "겨우" 분자들의 유희로 설명될 수 있다는 데에 대한 실망감과 반발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될 정도이니.

데니얼 데닛은 인지과학과 인지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생각하는 기계, 즉 인공지능의 개발에 아주 낙관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는 대표적 철학자다. 그 유명한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자 더글러스 호프스테터와 더불어 편집한 인지과학 선집 The Mind's I 는 한국에서 "이런, 이게 바로 나야?"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수록된 글들도 맘에 들고 김동광 선생님의 번역도 괜찮았는데, 제목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언젠가 그분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여쭈어 볼까 하다가 관뒀다). 작년엔가 한국에 다녀갔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그때 가서 얼굴을 보지 못한 게 참 아쉬웠다(데닛의 팬이라거나 그의 철학을 잘 알아서라기보다는, 그저 유명한 사람들 강연에 가서 목소리를 듣고 얼굴 보는 게 취미인지라).
 
그런 그를, 방금 전 영국의 시사지 가디언 기사( "The Semantic Engineer", Andrew Brown, The Guardian, Saturday April 17, 2004 )를 통해 접했다. 데닛 개인뿐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한 최근 인지과학 내의 흐름에 대해 개괄하기에 그만이다. 기자는 (뭇 과학자 위인 전기가 그렇듯이) 인터뷰의 한 1/2를 데닛이 얼마나 뛰어나고 철학뿐 아니라 요트, 악기 연주 등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인물인지를 강조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는데, 대신에 나머지 1/2은 데닛의 인지과학에 대해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게 소개하는 데에 바쳤다. 이런 식의 인물 중심적 기술이라면 과학사를 서술하는 방법으로도 손색이 없을 듯.

그의 철학적 화두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라이프니츠의 그것과 비슷한 물음에서 비롯된다 ("How can meaning, design and morality arise in a universe that began as meaningless, void and without form?"). 비록,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추구되고, 한쪽은 "유심론", 한쪽은 "유물론"이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데닛의 유물론은 "기계"적 유물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기계가 생각할 수 있다고, 그리고 기계나 사람의 사고 과정을 과학에 의해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과연, 그렇게 해서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인식된 내용에 대해 사고할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의사를 결정하고 의미를 창조하기도 한다. 사고, 믿음, 욕망 등이 다 같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심신 수반론의 가장 큰 걸림돌인 감각질(qualia) 및 창발(emergence)의 문제다. 한편으로 사고라고 해서 다 같은 것도 아니다. 사고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과정 또한 달라질 수 있다. 사과나 참새에 대해 사고하는 것과 유리수나 무리수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다르고, 또 "나"에 대해 사고하는 것도 다르다. 

여기에서 데닛의 낙관론은 다위니즘으로 이어진다. 의미와 기능의 산출이 생명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가 믿음을 갖는지 모른다. 뻐꾸기 새끼가 왜 형제자매를 둥지 밖으로 몰아내는지 모르는 것처럼. 바로 그런 의미에서 믿음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없다. 그저 본능처럼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다. 이 현상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대한 내적 표상에 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을 포함해서 두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의 원인인 것이다 (참고로 원인과 이유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원인-결과는 인과론의 틀 안에 있는 개념이고, 인과론은 환원론의 기본 전제다. 반면, 이유는 분석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결과의 사후에 설명되고 해명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자극을 인풋해주면, 아웃풋으로서 의미가 산출될 수 있다. 의식 현상 역시, 인풋에 대한 정보와 그 처리 과정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면 설명될 수 있고, 또 기계에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구문론적 기계를 넘어서는 의미론적 공학(semantic engineering)에 대한 데닛의 기획이다.

흠.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뭐라 말하기도 그렇고, 그리고 남의 전공에 콩 내놓아라 팥 내놓아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원대한 포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포부가 큰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무에서 유가 나오는가?"에서부터,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나는 누구인가?" 등에 대한 답이 하나일 순 없다.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을 단 한 마디로 대체하려는 생각은 너무 큰 포부일 뿐더러 착각이요 오만이다.

데닛을 비롯한 뭇 인지과학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이나 두뇌를 신비화하려는 낭만주의적 태도--흔히 반과학주의와 짝을 짓는 것으로 이해되는--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학을 "신비화"하려는 그들의 전략을 냉철하게 비판하고자 함이고, 그런 점에서 지극히 "과학적"인 태도다. 나는 인지과학이 모든 시점을 하나로 모으기보다는 시야의 범위를 넓혀 비가시적 영역까지도 볼 수 있게 해주리라 믿는다. 주는 것 없이 미운 그 녀석을 미워하지 못하는, 아니 미워하지 않으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 Daniel Dennett

Born: March 28, 1942, Boston.

Education: Philips Exeter Academy; Wesleyan University; Harvard (BA 1963); Oxford University (DPhil 1965).

Married: 1962, Susan Bell (one son, one daughter).

Career: 1965-70 assistant professor of philosophy, University of California at Irvine; '70-71 assoc prof, Irvine; '71-75 associate prof, Tufts; '75- prof, Tufts, '76-82 chairman, department of philosophy, Tufts; '79 visiting lecturer, Oxford; '85-2000 distinguished prof of arts & sciences, '85- director, Center for Cognitive Studies, 2000- University Professor, Tufts.

Books: 1969 Content and Consciousness; '78 Brainstorms: Philosophical Essays on Mind and Psychology; '81 The Mind's I: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 co-edited with Douglas Hofstadter; '84 Elbow Room; '87 The Intentional Stance; '91 Consciousness Explained; '95 Darwin's Dangerous Idea; '96 Kinds of Minds; '98 Brainchildren: Essays on Designing Minds; 2003 Freedom Evolves.



사진, 약력, 참고 기사 출처' target='_son'>http://books.guardian.co.uk ... 084,1192975,00.html>http://books.guardian.co.uk ... nbsp;

—박쥐

2004년 5월 6일 목요일

어린이날 기념식

blogin.com · 2004-05-06

또 비다. 게다가 바람까지 매섭다. 어제도 봄비라기보다는 가을비같이 내리더니만. 그래도 어젠 이렇게 춥진 않았었는데. 이러다 내일은 눈보라가 내리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 수업을 빠질 순 없다. 늦어서도 안 된다. 오늘 수업 때 다음 수업 때 읽을 아티클들을 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 수업을 할 교수도 매 시간마다 상당한 분량의 핸드 아웃을 돌리곤 하지 않았는가. 이 모든 것들을 제때 받지 않으면, 나중에 커버할 일이 까마득하다. "안녕"하는 인사 외에 별달리 말을 해본 기억이 없는 collegue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부탁이야 할 수 있겠으나, 부탁하는 말을 어떻게 문장으로 구성해야 할지, 그리고 도움을 받은 뒤에는 어떤 식으로 감사를 표시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그래, 늦지 않는 게 상책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교수의 얼굴이 보인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다행히 아직 시작되지는 않은 것 같다. 유인물 배부가 시작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쓴 원근법에 관한 글이다. 예상했던 바다. 수학사가인 그 교수는 얼마 전까지 "원근법의 역사"를 강의했던 바 있고, 오늘의 수업은 그 과목의 연장선상이자 보충이니까. 옆에 있는 친구가 교수 앞에다 대고 또 원근법이냐고 볼멘 소리를 한다. 교수는 웃으면서 자기 전공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30분을 줄테니 읽으라고 주문한다.

누군가가 다음 수업용 복사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아직 복사물이 준비되지 않았단다. 토론이 시작된다. 교수가 두 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는 누군가가 월요일 저녁 6시 수업 이전에 꽈사로 가서 복사를 한 다음에 수업 때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복사를 해서 모두에게 우편으로 부쳐주는 것이다. 두 번째 제안은 몹시 의외였다. 수업용 복사물을 우편으로 부쳐 준다는 얘긴 들어보지 못했다. 심지어 다음 수업은 그 교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맡은 건데 말이다.

갈등이 시작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 제안은 비효율적이다. 내가 월요일 수업 시작 이전에 시간이 있으니 복사를 맡겠노라고 자원하면 된다. 한국에서도 세미나나 수업 시간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곧잘 나서곤 하지 않았던가. 이번 기회에 이미지도 좀 쇄신하고.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말하나. Je peux faire ça car je suis libre ?

머릿속에서 몇 개의 유치한 문장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사이, 결국 교수의 친절한 제안을 따르기로 결론이 난다. 교수가 주소를 적으라며 백지를 돌리기 시작한다. 아직 늦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면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볼 것 같다. 시선은 텍스트를 향해 있지만 아무 글자도 들어오지 않는다.

옆의 친구가 교수에게 질문을 한다. 종이를 쥔 손을 내 쪽으로 향한 채다. 버릇이겠거니 하고 내버려 둔 채, 그들의 Q&A를 따라가려 집중한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질문을 마치자 내 쪽으로 종이를 '탁'하는 소리가 나게 내려 놓는다. 자세히 보니 교수가 주소 적으라고 돌리고 있는 종이다. 왜 그 손짓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저번에 내가 자기 말을 못 알아듣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도 저 아이였는데.

교수가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한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두피에서 소름이 돋는 게 느껴진다. 모든 게 한탄스럽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왜 말하지 못했을까. 왜 반 년이 넘어가도록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일까. 이러면 안되는데, 수업에 집중해야지. 시험까지는 채 두 달도 남지 않았다. 더구나 기하학과 미술이 만난 대표적 사례인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은 "과학에서의 美"에 대한 연구를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내게 무척 중요한 주제가 아닌가. 그치만, 조금 아까의 내 자신은 정말 용서할 수 없다. 아무래도 난 저 아이들처럼 거리낌 없이 질문하고 토론할 수 없을 것 같다.

문이 열리더니 꽈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들어와 손에 한 가득 들고 있던 것을 '쿵'소리가 나게 내려 놓는다. 순간 주위가 밝아진다. 바로 문제의 그 복사물인 것이다. 이제 죄책감/자괴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아, 게다가, 이게 무슨 횡잰가. 그 중 하나가 지난 몇 달동안 찾아 헤맸으나 결국 손에 넣지 못했던 <아날>誌의 그 논문이 아닌가. 그래. 이 정도면 절망에 빠질 스무가지 이유 중 하나는 상쇄될 수 있을 것 같다.

도망치듯 강의실을 나선다. 두 시간 후에 있을 도미니크 르쿠르의 제자들이 발표하는 세미나에는 가지 않기로 한다. 재미있거나 내 전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의 발표는 다음 주부터 시작될 거라는 지레짐작을 핑계/위안으로 삼으면서.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관계로 가서 졸 가능성이 꽤 크다는 것, 내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쳐야 할 숙제가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핑계/위안이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숙제를 할 힘을 내려면, 저 깊고 어두운 절망에서 한 발자국은 더 나와야 할 것 같다. 에클레르 까페를 떠올린다. 지난 겨울 사촌 언니의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처음으로 맛 본 후 잊고 있다가, 스노우캣이 다이어리에다가 에클레르에 대한 향수를 적어놓은 걸 지난 일요일에 보고는 당장 나가서 사다 먹었었다. 마들렌느+홍차-> 맛+향기 -> 기억/상기의 도식이 역전되는 순간이었지. 지금은 그게 되먹임되고 있는 중이고. 단 걸 좋아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걸 보니.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린이날이었구나. "과년한" 처녀가 웬 어린이 타령이냐고? 옛말에서 "어린"은 "어리석은"이라는 뜻이었다잖는가. 그래, 오늘만큼은 내가 아무리 어리석었더라도 좀 이해하기로 하자. 뜻밖에도 저 과자 하나가 "관용"의 정신을 상기시켜주는구나. 그 정도면 어린이날 기념食으로 충분하다. 그 하나만으로도 오늘 저녁은 어린이날 기념식을 겸한 성찬이 될 것 같다. 에클레르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네가 날 좀 살려줘야겠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니 오늘, 단 하룻밤만이라도.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