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23일 수요일

왜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blogin.com · 2005-02-23


오늘따라 이곳 바람이 유난히 매섭다 했습니다. 아침부터 눈발이 제법 오랫동안 흩날리길래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살얼음을 조심스레 밟아가며 힘겹게 집에 와서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미뤄둔 숙제를 마친 뒤에 열겠다고 다짐했었던 포도주 한 병을 따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팬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배우로서 좋아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팬이었다면 그 절망감과 안타까움을 어찌 달랠 수 있었겠습니까. 팬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데.

당신이 재능있고 촉망받는 여배우였다는 사실보다 내 또래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참 아프게 합니다. 당신이 유서에 남긴 말들, 일에 대한 열정과 욕심,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 하나 하나가 가슴 곳곳을 마구 후벼댑니다.

왜냐고는 묻지 않겠습니다. 부디 지금 계신 그곳에선 행복하시길.

—박쥐

2005년 2월 22일 화요일

푸앵카레, 합리주의, 개입

blogin.com · 2005-02-22

푸앵카레가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과 더불어 드레퓌스를 모함한 쪽에서 제출한 자료들이 증거로서 불충분함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푸앵카레들에 따르면, 反드레퓌스파들의 주장은 주장의 근거로서 제시된 자료가 필적학적으로 볼 때 위조된 것임에 분명할 뿐 아니라 통계학을 부적절하게 이용했다는 점에서 논증상으로도 오류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푸앵카레를 졸라처럼 반유대주의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당대 지식인 그룹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그가 이 사건에 개입했던 것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문제 의식이나 과학자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자각에서가 아니라 과학의 몰이해 및 오용에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다분히 과학주의적인, 그러니까 과학에 관한 한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 보느냐의 문제와 한 인간으로서의 과학자를 사회 내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늘 산뜻하게 연결되지는 않는 듯하다. 과학에 대해 상아탑 속에서 오로지 저 밖의 진리와만 교통하는, 즉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그 어떤 것과의 접촉도 허용하지 않는 상을 가진, 그러니까 아주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과학관을 지닌 과학자라고 해서 사회와는 무조건 담을 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과학에 대해 아주 급진적인 입장을 가진,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연구 활동은 다른 모든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실천이다"라고 주장하는 구성론자/과학사회학자라고 해서 늘 정치적으로 진보 혹은 좌파에 속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과학에 관한 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프랑스 인식론자 그룹만 봐도 그렇다. 바슐라르의 경우, 과학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늘 잊지 않았지만 사회 현실을 향해서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킨 축에 속했었던 반면, 코를 씻고 맡아 봐도 도무지 사람 냄새라고는 나지 않는 가장 추상적인 학문인 수학과 논리학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던 장 카바이예스는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일하다가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에 나치에 의해 총살을 당했을 만큼 열렬한 참여론자였다.

내 경우, 과학에 관한 한 한때는 파이어아벤트를 추종할 만큼 급진적인 입장으로까지 갔다가 프랑스 인식론에 경도되기에 이르렀고, 지금은 이들의 과학에 대한 "합리적 신학"에 대체로 동감하는 편이다. 이성에 대한 믿음은 과학 활동의 원동력으로서나 사회의 변혁을 추진하는 힘으로서나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거기에서 "합리주의적 개입/참여(engagement rationaliste: 바슐라르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의 개념이 나온다.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理性에 合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과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合理적이다. 이성의 한계 언저리에서 지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닫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