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차이와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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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2015년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이번에도 제목에 찬사를. 영제 "Right Now Wrong Then" 도 브라보. 프랑스에서는 "Un jour avec, un jour sans" 이란 제목으로 개봉. 직역하면 "하루는 있고 하루는 없고" 정도가 되겠는데, 이 역시 나쁘지 않다). 이 영화 만큼 "차이와 반복"을 주제적으로 그리고 형식적으로 체현한 영화가 또 있었을까. 앞으로도 당분간은 또 나올 것 같지 않다. 

이쯤 하면 당장 예상되는 반론 : <라쇼몽>이 있었고, 심지어 바로 같은 감독의 <오, 수정>이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하루가, 같은 사건들이, 같은 순서로, 무한 반복되는 일종의 시간여행 소재의 (탈을 썼으나 사실은 "영원회귀" 교설의 영화적 해석이라 봐도 좋을) 장르 영화로는 Groundhog Day, 최근에는 나로서는 꽤나 재미있게 본 Edge of Tomorrow 가 있었다. 참, <엑스파일> 6시즌의 "Monday" 도 있었다. 두 부류의 영화 모두 영화적 시간성, 아니 시간성 자체(그리고 "영원회귀" 교설/신화!)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고 실험의 소재를 제공하는데, 이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그 두 범주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니면 그 중간 지점에 있거나. 그도 아니면 둘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거나. 

순수 차이와 순수 반복. 그중에서도 반복의 역할이 결정적이며 거의 초월적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아무 설명 없이 그저 반복만으로 생겨나는 차이.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차이란 것도 너무나 미묘해서 이런 종류의 담론에서 곧잘 인용되곤 하는 카오스 이론의 이른바 "나비 효과", 즉 원인에서의 미묘한 차이가 결과상의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는 논변은 부적절하다. 원인상의 차이도 미묘하고 결과상의 차이도 미묘하다... 영화 서사를 구성하는 사건들 사이에 원인과 결과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굳이 원인과 결과를 꼽자면, 전자는 남주인공의 여주인공에 대한 태도겠고, 결과라면 헤어지고 각자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결말일 것인데. 여기에서 각 사건을 "태도"나 "결말"이라 이름 붙여도 되나 싶은 것이, 사실 각각은 그보다 훨씬 더 미세한, 심지어 미소하다(infinitésimal)고도 할, 그런 종류의 사건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1부에는 남주인공이 호텔방 안에 드러누워 "너무 예뻐. 조심해야지. 하룬데" 라며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는데 2부에는 없고, 1부에서 화가인 여주인공의 작품에 대한 무성의하지만 그럴 듯해 보이는 견해("뭔가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뭔지 모르면서")를 밝히는데 2부에서는 좀 회의적이고 냉소적이지만 그런만큼 그냥 쉽게 내던진 건 아님을 짐작케 하는 의견("퀄리티는 좋은데 좀 상투적인 것 같아요. 작품으로 위로를 받으려 해서 그래요. 원래 위로는 상투적이어야 하잖아요" :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논변이었지만)을 제시하는 등등 차이(그런데 여기에서 에릭 로메르의 옴니버스작 <파리의 랑데부 Rendez-vous à Paris> , 특히 그 중 한 단편, "Mère et enfants 1907" 을 떠올린 건 나뿐일까? 남녀의 역할만 바꾸면 정황과 대화의 내용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에서는 회화 전문 출판업자의 아내이자 본인 스스로도 식견이 높은 여성이 남성인 화가에게 "아직 정착하지 않고 뭔가를 찾아가는 중인 것 같아요" 하고 말하는데 이 말을 화가는 맘에 들어한다. 이 영화는 보통 로메르의 평작으로 평가되고 나도 이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지만 이 단편만큼은 좋아한다. 특히 마레 지구 골목을 따라 걸어가며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수작을 펴는 장면을 발걸음 및 대화에 맞춰 리듬감 넘치게 담은 시퀀스 샷). 가장 결정적인 차이라면, 아무래도, 1부에서는 남주인공이 자신의 결혼 사실에 대해 의도친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솔직하지도 않았던 데에 반해, 2부에서는 자진해서 밝힌 데에 있을 것이다. 같은 사실과 서사 구성 요소라도 어느 맥락에, 그리고 어느 시점에 놓여지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그런데 바로 그러한 미묘한 차이들이 영화 전체, 그에 대한 감상에 미치는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그리하여 영화는, 지방으로 내려간 영화감독이 현지 여인을 만나 수작을 걸고, 여인은 넘어오기도 하고 안 넘어오기도 하고 등등, 홍상수 영화에서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인물 구성 및 서사에서 출발했음에도, 결국, 홍상수 영화에서는 이례적으로, 웬만한 로맨틱 코미디 부럽지 않은 수준으로, 너무나 산뜻하고 따뜻한 결말을 맺기에 이른다. 2부 마지막. 어디부턴가 살짝 눈이 흩날리기 시작하고, 뒤에서 어젯밤 헤어진 그녀가 나타나고, 둘은 수줍은 소년 소녀처럼 대화를 나누고, 그가 악수를 청하자 그녀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가면서까지 흔쾌히 답하고... 그리고는 끝인 줄 알았더니, 웬걸, 그가 다시 극장으로 들어와 그녀를 찾고, 어둠 속 객석에서 둘은 속삭인다 : "보고 싶었어요" "나도요" "이제 감독님 영화 다 볼 거에요" 그렇게 헤어지고 극장을 나온 그녀가 함박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샷은 비현실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이 홍상수의 세계임을 감안하면.

또 하나의 차이와 반복. 대개의 홍상수 영화가 그랬듯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음악이 전혀 나오지 않는 대신(이 역시 참으로 로메리앙한 측면), 1부의 처음과 2부 시작하기 전, 그리고 피날레로는 같은 음악이 흘러 나온다(로메르 영화에도 가끔 예외가 있었는데 <녹색 광선>이 그 중 하나였다.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에 잠깐 무반주 현악곡이 흘러 나온다. 로메르 자신이 작곡한). 그리하여 음악은 오페라 같은 악극에서 서곡이나 일종의 표제곡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 생각해 보니 <옥희의 영화>에서도 그랬다. 거기에서는 위풍당당 행진곡이 무척 생경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기에서는 현악으로 편곡한 "봄이 오면"이다. 편곡이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봄이 오면"의 가사를 떠올려보니 제법 그럴싸하다 :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건넛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 가주" 꼭 봄바람이 아니더라도 살면서 마음이 흔들릴 일이 없겠는가. 그 흔들림에 대처하는 자세를 영화는 두 가지 사례로 보여준 셈인데. 사실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차이라고는 식별하기 힘든 디테일이 전부지만, 그 디테일의 변화가 참 많은 차이를 낳는다. 실제 삶도 그럴 것이다.

과학철학 및 과학사 개론서에 관해 답함

저도 무척 반가웠어요. 질문도 무척 반갑네요. 전공자로서 인정받은 일은 실로 오랜만이어서. 그것도 전도유망한 동학에게.

더구나 개론서 혹은 입문서는 제 오랜 관심사 중 하나이기도 해요. 개론서라는 것을 단지 초심자를 위해 접근성과 대중성, 나아가 상업성을 추구하는 일종의 하위장르라 볼 게 아니라 생각하거든요. 한 분야 전공하다 보면 대개는 세부전공에만 주력하느라 거시적이고 개괄적 관점을 놓치기 쉬운데, 그리고 그것이 특히 철학도에게는 때로 치명적 결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을 보완하도록, 최소한 그에 대한 주의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개괄서랄까요. 전공자라면 아무래도 자기 분야 개설서에는 비판적 시각에서 접근할 거고, 유사 혹은 근접 학문 전공자--이를테면 현대 프랑스 철학 전공자에게 과학철학이 그렇듯--라면 비판적 시각에 참신함을 더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틈만 나면 제 분야 및 유사 분야에 새로 나온 개론서 없나 확인하고 또 가능하면 수집도 하는 것이 제 취미랍니다.

그런데 철학사적으로 다룬 과학철학 및 과학사 개론서라. 의외로 어렵네요. 게다가 방법론에 참고가 될만한 것으로. 흔히 프랑스 인식론이라 하는 프랑스 과학철학을 말하는 건가요, 아님 영미권 포함한 전반? 들뢰지엔느에겐 아무래도 전자가 맞을 것 같으니 그렇게 가정하고 답을 해보면. 일단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바, 프랑수아 샤틀레 François Châtelet 가 편집한 Histoire de la philosophie 에 4권에 실린 글이에요. 알다시피 들뢰즈가 구조주의 관련 글을 맡아 썼고 이것이 마지막 권인 현대 편에 실렸는데, 같은 책에 미셸 피샹 Michel Fichant이 인식론을 개관하는 글을 실었죠. 옛날 글이긴 한데, 책 전체의 기조나 필진 면면을 볼 때 추구하는 방향성과 맞을 것 같고, 또 글 자체도 바슐라르, 캉기옘, 까바이예스 등등 이쪽 계보에 관해 간명하게 정리한 글로는 제가 본 중 손에 꼽을 정도이기도 하고.

좀더 일반적이고 무난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닌 입문서로 저도 아직까지 즐겨 찾는 책으로는 끄세주 Que sais-je 총서의 Épistémologie 가 있어요. 이게 있고 또 같은 총서로 나온 Philosophie des sciences 가 있는데, 저는 좀더 프랑스 인식론 계보를 따르는 전자를 선호해요. 후자는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라는 책 저자로도 유명한 도미니크 르쿠르가 썼는데 좀더 스탠더드한, 영미권 과학철학까지 포괄하는 좀더 균형 잡힌 접근을 보려면 이 책이 더 나을 수도.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과학철학/사를 철학사적으로 접근하는 시도에 대해 생각을 해봤어요. 앞서 언급한 피샹은 과학사와 철학사의 접목을 시도한 모범적이면서 또 전형적 사례라 하겠는데, 이는 이분 주전공인 라이프니츠라는 인물의 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17세기, 나아가 최소한 19세까지 철학자와 과학자 진영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어요. 이 전통을 이어, 그리하여 역사성을 담보하는, 여기에서 역사라 해서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사례에서 보듯  독일 철학의 어떤 관념론적 전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아니라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정신의 흐름에 주목해 온 것이 프랑스 철학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게루, 뷔유맹 같이 걸출한 철학사가인 동시에 과학사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좀 다르지만 들뢰즈도 이 전통으로부터 멀지 않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요? <차이와 반복>의 다종다양한 참고문헌 목록에서 이미 드러나듯. 철학사가로서의 하물며 과학사가로서의 들뢰즈에 대한 평가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철학사와 과학사를 사상의 재료로 삼는 방식만큼은 모범적이었고 또 전형적이기도 했다고 볼 수도. 물론 그런 의미에서 훨씬 더 전형적이면서 모범적인 사례로는 단연코 푸코를 꼽아야겠지만요.

그냥 생각나는대로 썼더니 정작 도움이 될 얘기는 없는지도. 다음에 만나면 또 얘기해요. 그런데 생각나면 또 쓸 수도. 제가 워낙 계단생각 esprit de l'escalier 에 익숙한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