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의 배

blogin.com · 2009-05-01


Hieronymus Bosch, 1500년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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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던 중

한 대목에서 눈을 의심했다. 그의 "광인의 배 (Nef des fous, stultifera navis, Narrenschiff)"에 대한 묘사가 갱스부르 노래의 내용과 기가 막히게 일치하고 있지 않은가.

르네상스 시대, 그러니까 데카르트적 이성이 비이성-광기를 축출하거나 가둬놓기 이전, (스스로 미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광인들을 배에 실어 떠나 보냈다. 왜 배인가? 단지 그것이 당시에 원거리를 이동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또 편리한 수단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요한 이유는 물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유럽인의 꿈 속에서 물과 광기는 연결되어 있었다." (26쪽)

모든 것을 옮기고 또 정화시키는 물, 물에 몸을 실은 배는, 다시 그것에 몸을 실은 사람을 다른 세계로 보낸다. 다른 세계로 간 그는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그를 통해 떠나왔던 또 다른 세계를 만난다.

그는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다. 배는 늘 잠시 머물렀다 이내 곧 떠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잠시 머무는 곳도 도시의 성문 주변이다. 그가 있는 곳은, 있어야 할 곳은, 언제나 문지방이나 경계다. 기껏해야 다른 세계와 또 다른 세계를 이동하는 동안 임시로 '점유'하는 공간이 전부다. 그에게는 성문가(성안도 아니고 성밖도 아닌)에 "갇혀" 있을, 배제되면서도 바로 배제로써 포함될 수 있을 특권이 주어져 있다. 그에 앞서서는 "포함적 배제", "배제적 포함"의 대상이었던 "호모 사케르"(아감벤)가 있었고, 그의 뒤엔 "이 세상이 아니라면 어느 곳이든 가겠다"던 보들레르의 이방인이 있었다.

갱스부르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너'는 바로 배에 실려 떠나가는 광인이다. '나'는 이성이라 해두자. 이 짝은 물론 (상징으로서의) 여성/남성, 인식대상/인식주체, 욕망(사랑)의 대상/욕망(사랑)하는 자, 세계/언어, 진리/이성 등등과도 매치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몸소 실어 보냈건만, 막상 네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는 이내 맘이 바뀌어 그 뒤를 좇는다. 너를 좇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너와 나는 사실상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와 나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내가 아킬레스라면, 너는 거북이다. 내 정신 속에서 나는 매 순간 정지해 있고, 그런 동안 너는 늘 한 발짝 나아가 있다. 따라서 나는 너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멈추어 서서 나는 너를 본다. 물길이 네 치마자락 휘감고, 너는 얼굴을 가린다. 네 표정에는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후회가 가득하다. 너를 감싸고 있었던 광채는 온데간데 없다. 너는 초라하다. 한때 모든 것을 다 가졌었건만 한 순간에 가족과 부와 영예를 모두 잃은 헤쿠바, 이성의 판정 앞에 무릎꿇은 형이상학이 바로 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의 노예다. 나는 너를 따르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아무리 내 머리나 가슴이 찢어진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너의 경우에 있어 찢기는 것은 네 몸일까?). 비록 너와 내가 맺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지라도. 

—박쥐

물속으로 잠겨드는 너

blogin.com · 200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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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추억의 강으로 떠나가고,
나는 돌아오라 외치며 강기슭을 달려가네

너는 그저 느리게 멀어져 가고,
네가 아무리 애써 달려도
나는 조금씩 네게로 다가가네

물 속에서 가까스로 떠오를 때마다
너는 망설이네 그리고 나를 기다리네
치마자락을 걷어올려 얼굴을 감추며
얼굴이 상할까 하는 두려움에,
그리고 부끄러움과 후회로

너는 이제 그저 길잃은 배
물에 빠진 개일뿐이지
그래도 난 여전히 너의 노예
물속에 몸을 담그네

추억이 멈출 때 우리는
망각의 망망대해 속에서
가슴이 그리고 머리가 찢어진들
결코 맺어지지 못하리"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카를라 브뤼니의 첫 번째 앨범을 통해서였다. 다른 노래들도 나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세르주 갱스부르가 작곡한 바로 이 곳, "La noyée"다. 브뤼니의 작곡 솜씨도 나름 훌륭하지만, 그래도 명실공히 천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갱스부르만 하랴. 물론, 브뤼니가 이 노래에 대한 나의 인상에 있어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함은 분명하다. 내게 이 노래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그녀니까. 또 하나 덧붙이자면, 편곡은 둘째치더라도, 적어도 그녀의 우수어린 목소리 만큼은 이 노래와 아주 잘 어울린다. 이를테면 안나 카리나(그녀도 자신이 만든 영화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보다는 훨씬 낫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간을 거꾸로 거스르고 길을 굽이굽이 돌아 발견한 갱스부르의 이 '정격' 연주. 그런만큼 내겐 매우 값지게 느껴진다(고맙다, 유튜브!). 그 어느 노래가 예외가 되겠냐만, 갱스부르의 곡들은 특히 연주자/해석자/편곡자를 아주 많이 '타는' 것 같다. 같은 "Je t'aime moi non plus"도 제인 버킨과 부른 버전과 브리지트 바르도와 부른 버전이 상당히 다르다.

다음은 마구잡이 인상 비평 :

물 물속으로 잠겨드는 여인(오필리어), 아니, 물의 여인(운디네), 물에 감겨 올라간 치맛자락. 공무도하가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공무도하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수면, 즉 '네'가 떠올랐다 잠겼다 하는 그 표면 또한 지배적인 인상 중 하나다.

이별 멀어지는, 잡힐 듯하지만 끝내 잡히지 않는(아킬레스와 거북이? 무릇 시간과 운동의 속성이란 그런 것이겠다), 떠나는 자의 뒷모습... 떠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무리 끝까지,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감추면서"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자 한들, 마지막은 기억 속에서 변형되거나 무화될 뿐이다...  

이번에도 역시...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사실 시를 평하듯 가사 비평을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번역까지 했거늘...

손을 놓은지 오래여서일까, 문장력이나 필체에 슨 녹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핵심을 피해서 끝없이 우회하는 고질병이다. 어릴 적부터 난 늘, 정면돌파할 방법을 충분히 알면서도, 목표물을 빙 둘러 내 스스로 미로를 쌓아 일을 어렵게 만들곤 했다. 논술을 공부해야 했던 시절에는, 매뉴얼대로 글쓰는 일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 버릇을 글쓰기에도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확장된 글버릇은 학부 시절 시험을 치를 때나 명색이 철학도가 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게 글을 써야할 때조차 위력을 발했고, 또 여전히 발하는 중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그저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들을 일 없을" 이 갱스부르의 노래를 듣는 일에 만족하기로 하고... 그래도 여전히 가슴 속에 어떤 아쉬움 같은 감정이 남는다면, 별 수 있으랴, 달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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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