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리 시대에 사실을 논한다는 것은

언제부턴가 너도 나도 "팩트"를 말하기 시작했다. 각 언론사마다 "팩트 체크"에 특종 보도 이상의 열의를 보이고, 토론에서는 이론이나 논리로 무장하고 있어도 상대방이 구체적인 "팩트"를 들이대면 반박하기 힘들어졌다. 정확하게는, 팩트"라" 말하기 시작했다 해야 할 것이다. 사실을 검증하는 일이나 사실로 반박하는 일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의 개념과 위상이 바뀌면서 그것이 주장과 갖는 역학 관계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팩트 폭력"이나 "팩트리어트"란 신조어가 시사하는 바, 영단어 "팩트"로의 대체는 이 현상을 일정 부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Phil Venditti/FlickrCC BY
이러한 언어 현상에는 영어 패권주의와 사대주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 중 하나는 과거 권력층과 언론이 독점했던 이것을 이제는 누구나 생산하고 배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체크, 즉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실의 검증과 확인이야 누구에게나, 특히 언론에는 필수적인 직업윤리에 해당하겠으나,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매개로 사실과 정보가 민주화되면서 그 필요성이 한층 더 부각되고 강제성이 대두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사실에 대한 증거들은 한낱 조작된 것이거나, 사실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론으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아폴로 11호의 달착륙도 마찬가지. 이를 사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착륙 장면을 촬영한 화면이나 성조기 같은 것들은 조작된 증거이고, 이는 미국의 세계 지배 음모, 군수산업 비리 등등 다른 가설과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이 음모론의 구조다.

반대로 사실이 아닌 허구를 사실로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할 이론과 논거를 들이대는 경우가 있다. 드레퓌스 사건이 그러했고, 한국의 현대사에 숱하게 등장한 조작 사건들이 그러했다. 한 무고한 이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리하여 그가 유죄라는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는 물적이든 심적이든 증거를 제시한다. 증거가 부족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드는 것이니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반박하는 증거가 나오면 애드혹 가설을 만든다. 고문 당하다가 죽은 사람이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을 정도로 심각한 심장질환자로 돌변한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이론과 가설은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요새 말로 "정신승리"(최신 유행어이고 민간 용어인 줄 알았더니 mental attainment 라는 심리학 용어로도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그것이 정신의 힘이자 한계다. 

이런 걸 보면 이론이 아닌 경험이 지닌 힘에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왜 푸앵카레 같은 수학자들이, 그리고 오늘날 초끈이론이니 퀀텀 룹 이론이니 하는 가장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을 구상하는 이론물리학자들이, 아니 그런 부류일수록 더더욱, 실험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지 . 포퍼의 반증론이 거기에서 나왔다. 아무리 수학적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믿 이론도, 그리고 제아무리 많은 경험을 수렴해서 설명하고 포괄하는 이론도, 반박하는 실험 사실 하나에 무너진다. 

그러나 다시,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실이 지시하는 바는 무엇인가? (과학적/과학철학적)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실재인 것인가? 저기 어딘가에 있으면서 주어질 때에는 거기에 있던 그대로 주어지는? 소여data가 온전히 주관에 독립적이며 있는 그대로 주어진다는 믿음은 사실 신화에 가깝다 ("소여의 신화"). 목성, 전자, 뉴트리노, 중력파 등등에 관한 사실들이 그 자체로서 실재를 가감 없이 기술한다는 믿음. 그 믿음의 근거를 따지기 시작하면 곤란해진다. 기껏해야 소극적 논변, 즉, 인식 주체인 우리에 독립해 있는 세계의 존재도 그렇거니와, 그렇게 믿지 않으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옹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사실은 어쩌면 물신과도 같다. 여기에서, 맥락이 좀 다르긴 하지만, 브뤼노 라투르가 사실fait에 물신fétiche를 결합해 창안한 패티쉬 (faitiche)라는 개념이 유용하겠다 (쓰고 보니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처럼 음성적으로는 거의 유사하나 문자적으로 의미가 달라지니 이것도 참 재미있다). 있는 그대로 주어져 있지도, 그렇다고 구성된 것도 아닌, 그 경계에 있으며 그 경계, 나아가 경계가 구축하는 세계의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사실을 말한다. 한편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세계를 구축하도록 하는 근거이자 원리가 되기도 한다. 패티쉬의 고유하고 역설적인 존재 양식을 스텐게르스는 우리로 인해 존재하는 동시에 우리를 존재케 하는 것이라 풀어 설명한다 ("뉴트리노의 역설적 존재 양태", Isabelle Stengers, Cosmopolitique I, p. 29). 이렇게 되면 사실-패티쉬는 사실 우리가 아는 사실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오한 어떤 것을 지칭하게 되는데... 어쨌든, 사실이라 해서 무조건적으로 신봉할 것이 아니고 객관성과 중립성을 절로 담보하는 것도 아닌 만큼, 사실만능주의는 사태를 너무 단순히 파악한 결과라 하겠다.


Ron Mader/Flickr CC BY
브렉시트에 이어 미국 대선에 이르기까지, 2016년은 "탈진리post-truth"라는 이름 하에 사실과 진리라는 철학의 가장 전통적인 화두가 가장 시사적인 방식으로 재발굴되고 재조명된 해였다.  믿기지 않는 '팩트'에 기댄 선전과 선동이 정말로 믿기지 않는 또 다른 '팩트'를 생산하는 현실. 내가 믿고 싶은 바대로 사실을 보고, 아니 지어내고, 그것은 대체(적으)로 옳은 것(alt-right)으로 간주되는 대체 사실(alternatif fact)이 된다. 그러한 사실의 인식적 가치는 더 이상 진리치에 있지 않고 의미치에 있다. 사실 판단보다 가치 판단이, 사실보다 관념과 신념이, 사실의 진리보다 이성의 진리 (진리의 두 가지 종류에 대한 라이프니츠 이래 전통적인 구분법을 아렌트는 <진리와 정치>에서 이렇게 비틀고 있다. 즉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진리와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진리의 이항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회의 이항 대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성보다 감성이, 논리학보다 수사학이, 로고스보다 독사나 파토스가, 진리치보다는 의미치가 우선시된다. 물론 이 이분법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며, 앞에서 적었듯 '사실'이라는 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아님을, 니체 이후 소위 탈근대 시대를 사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관념에 근거해서 재단된 사실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며, 현실과 괴리되고 현실에 근거한 정당성이 부족한 관념일수록 강경화되고 독단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다름 아닌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Fair Playing "Fairest of the Seasons"





"영정 사진에 잘 어울리는 얼굴". 예전에 김승희 시인이 요절한 어느 여류 시인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한 말이다. 한창 나이였던 고인의 죽음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 그런 만큼 촬영 당시에는 사진사도 모델도 장차 그럴 용도로 쓰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찍은 사진임이 분명한데도, 까만 뿔테 안경, 그 뒤로 반짝이는 커다란 눈, 창백한 안색 등등 모델이 워낙 우수에 찬 얼굴을 가져서인지 그만 장례식장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사진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니코의 Chelsea Girl 앨범의 첫 곡 "Fairest Of The Seasons"를 들을 때면, 노래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목소리가 장송곡이나 진혼곡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전까지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앨범에서는 니코가 나오면 다음 트랙으로 건너뛰곤 했다. 모름지기 벨벳의 노래는 무엇보다 루 리드가 그 퇴폐적이고 발칙한 노래를, 그 청초하고 담백하며 냉소적이고 체념한 듯한 담긴 목소리로 불러야 하거늘. 그소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전적으로 니코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중저음에 중성적인 목소리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Femme fatale" 같은 경우는 니코가 아닌 다른 보컬을 상상하기 힘든 것이 사실. 그런데 딕션이 이를 반감시킨다고 생각했다. 노래 처음부터 끝까지 음색 변화 없이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대신, 가사 전달에 있어서는 노랫말마다 음절 하나 하나를 분절하는 부름새가 벨벳의 정신과 너무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All Tomorrow's Parties" 를 to-mo-row-z-par-tee-z 로, 거기에서 또 마지막 z는 길게 늘여서 부르는 식. 뜻도 모르고 그저 앵무새처럼 가사를 외워서 단어 단위도 아니고 음절 단위로 하나 하나, 또박 또박 따라 부르는 품에서, 동요대회에 출전한 아동이 연상되곤 했던 것이다. 의 노래가 무심한 듯해도 진심이 담겨있는 느낌이라면, 니코는 온갖 진심과 정성을 들이는 것은 알겠는데 모종의 아쉬움을 계속 남기곤 했던 것이다. 악센트를 감추려는 의도 같기도 하고, 아니면 유창하기는 해도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노래를 하느라, 그 사실을 매순간 스스로 자각하며, 단어 하나 하나, 음절 하나 하나마다 각성하고 긴장한 상태로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외국어와 불화하며 10년 이상을 살아온 자의 지나친 투사일까. 

그런데 "Fairest of the Seasons", 즉 "가장 찬란한 계절", 그리고 저 노래가 실린 니코의 독집 앨범, Chelsea Girl , 가수로서, 나아가 뮤지션으로서의 그녀에 대한 회의적 평가를 전면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앨범에서 니코는 루 리드, 존 케일, 밥 딜런 등 거물들에게 받은 곡들을 소화하는데, 첫 번째 곡인 이 곡이 단연 압권. 과장하거나 과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애써 억누르거나 감추지도 않고, 담담하게 드러내는 낮은 목소리가 돋보인다. 기타와 현악 위주의 편곡에도 잘 어울린다. 여기에서도 "seasons"를 sea-son-z 로, 또 z는 길게 늘여서 부르는 건 여전하지만, 그것도 도드라지거나 거슬리기보다는 그녀만의 고유하고 개성적인 스타일로 받아들여진다.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구스 반 산트의 영화 Restless 에서였다.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뒤 우울증세를 보이며 연고없는 이들의 장례식장 다니는 게 취미인 소년과 시한부 인생인 소녀의 따라서 시한부인 사랑을 그린 영화. 문제의 노래는 영화 마지막 소녀의 장례식 시퀀스에 나온다. 소녀의 행복했던 시간에 대한 소년의 플래쉬백, 그리고 그 시간을 생각하며 빙그레 미소짓는 소년을 배경으로. 거기에 니코의 목소리가 현악 위주의 편곡에 어우러지며 "언제 떠나느냐고 묻거든 가장 찬란한 계절에 떠나리"라 읊조리는데, 거기에는 죽음이라는 비극적 상황 앞에서 바로 그 소년과 같은 미소를 짓게 하는 힘이 있다. 루 리드식의 냉소적이며 자못 패배주의적인 무심함과는 다른, 따뜻함이 느껴지는 담담함이랄까.

한동안 잊고 있던 이 노래를 웨스 앤더슨 헌정 음반인 I Saved Latin 에서 다시 만났다. 웨스 앤더슨 영화에 쓰인, 고로 웨스 앤더슨의 음악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하면서 그 자체로 전설들인 곡들을 이 시대 인디밴드들이 커버해서 만든 음반. 벨벳(내가 좋아하는 "Stephanie Says")도 있고 데이빗 보위도 있고 또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Temps de l'amour" 도 있다. "Fairest of the Seasons"는 여기에서는 인디밴드 Trespasser's William 가 불렀다. 단순한데도 몽환적인 기타 반주로의 편곡도 좋고, 보컬은 니코보다 실력이 단연 월등하다. 그러면서도 니코가 연출하던 담담한 목소리를 또 다른 방식으로 살렸다. 떠나야 한다면 찬란한 계절에, 그리고 떠날 때는, 당당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대도, 담담하게,라 전하던 바로 그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