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7일 토요일

좋아하는 남자배우

얼마 전 좋아하는 남자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도무지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대화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여배우는 당장 떠오르는 사람만 해도 꽤 되는데 왜 남배우는 없는 걸까, 내 성적 정향을 재고해야 하는 걸까, 하던 중, 갑자기 리스트가 좌르륵. 그래서, 난 적어도 레즈비언은 아니군, 하며 혼자 빙그레.

하긴, 내 원초적 영화 경험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기에는 남자 주인공들,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져 잠 못 이루고 상대역인 여배우를 질투한 기억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백투더퓨처 의 마이클 제이 폭스가 대표적. 연모의 대상은 배우 개인이기보다는 그가 맡은 가공의 인물에 가까웠겠으나. 아니면 러브스토리 의 경우처럼 인물 자체보단 인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이고, 인물들은 다만 그 낭만적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로서만 의미를 가졌던 것일 수도. 물론 이성애중심주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재현물을 좀더 자주 접했더라면 또 얘기가 달랐으리라.

하여간 그래서 생각난 배우 중 단연 일순위는 장루이 트랭티냥. 젊은 시절의 그는, 대표적으로 모드네에서의 하룻밤 에선, 단정하고 꽉막히고 보수적인 인상이었다. 그로부터 근 오십년이 지난 후에 찍은 아무르 에서도 그 인상 그대로. 그런데 그 여전한 고리타분함과 고집스러움이 그 사람의 진실함을 대변하는 듯했고, 그게 참 존경스러울 뿐 아니라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날 설레게 했던 또 다른 배우는 콜린 퍼스. 퍼스라기보단 오만과 편견 의 미스터 다시라 해야 할까. 아니면 배우 퍼스가 재해석한 미스터 다시. 같은 배우가 이를테면 위험한 관계 의 발몽을 맡은 걸 보면서는 참으로 어색하고 불편하기 그지 없었으니. 어니스트 되기의 중요성 에서처럼, 딱 빅토리아 시대를 전후한 영국의 상류층 인사, 당대의 규범에 충실히 따르고 어느 면에서나 모범적이지만 실은 가슴에는 열정과 정의감을 품은, 그리고 자신의 위치와 기성 질서에 거리를 둘 줄 아는--비록 반성에만 그칠 뿐 변화를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그런 역할에 어울리는 풍모. 그게 이 배우가 내게 호소하는 매력.

요새 배우들 중에서 꼽으란다면... 또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네. 외모니 인상이니를 떠나 작품 고르는 안목이나 배우 혹은 예술가로서의 열정 면에서는 마티유 아말릭, 멜빌 푸포 등. 둘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하긴 나도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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