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부재 증명과 존재 이유





Clinamen v.9
Céleste Boursier-Mougenot, 2023, Mixed materials, 70 cm × 17 m,
Production supported by the Asia Culture Center


이 블로그의 리뉴얼과 블로그인(bloggin.com) 시절 블로그의 복원은 오래된 숙원 사업이었다.  클로드 덕분에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바를 전달하고 이를 실현하게끔 명령어 구문을 짜는 일은 물론 그 전에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까지도. 사실 이조차 정확치는 않다. '원하는 바'란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고 대개 모르고 시작했다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나중에서야 비로소 구축되게 마련. 처음에 막연하게 그리고 있었던 그 무엇인가란 아마도 이상에 가까웠겠으나 결과는 그보다는 비루한 그렇지만 어디까지나실존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 점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현실, 이상과 현실의 접점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생성)인공지능 그리고/또는 거대언어모델에 의존하지 않고서 이렇게 자동기술/의식의 흐름만으로 한 문단을 써내려간 것, 실로 오랜만이다. 여기까지 쓰니 또 말이, 글이, 줄글이 끊긴다. 툭. 그리고 침묵. 마치 침묵으로 일관한 2년의 시간이 부족했다는 듯이. 엄마가 가끔 쓰는 표현대로 "벙어리 말문 트이듯" 봇물이 터질 줄 알았는데. 눈이 트인 심봉사에게는 잠 자는 시간도 아까웠을 텐데. 이 대목에서 몰리뉴 문제를 떠올리고 몰리뉴의 철자법을 환기하고 관련한 논설을 이어갈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관련해서 몇 줄 아니 몇 자라도 쓸 것 같으면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내용을 직접 확인해야 하나 몸도 마음도 이에 따르지 않는다는 생각에, 접는다. 동시에 떠오르는 무수하고 다종다양한 생각들. 글쓰기는 이 공간적 사유의 습성을 그나마 어르고 달래서 --마치 데미우르고스가 형상을 수용하도록 코라-질료를 설득하듯-- 시간과 논리의 순서에 맞도록 정돈하는 거의 유일한 방책이었다. 이를 게을리했으니 사유가 정체한 것도 당연하다. 정체가 계속되는 동안 퇴보한 것도 당연하고. 

그러고 보니 수년 전, 아마도. 수십 년 전... 또 하나의 기억이 팝업창처럼 떠올랐지만 이를 줄글로 펼칠 생각을 하니 또 지난하고 아득해질 것 같아 관둔다. 그렇지만 문자가 모여서 문장이, 문장이 모여서 문단이 기계가 아닌 방식으로 "생성"되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으니 (과장을 보태면) 감개무량하다. "기계가 아닌 방식"? 그것이 "자동적" 혹은 "자율적"인 방식, 심지어 "기계적"인 방식이 아니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내가 이런 방식의 "자동기술"이나 번역을 좋아했던 것도 결국은 바로 그러한 "기계적"인 면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측면을 그 누구 아니 그 무엇보다 뛰어나게 수행하는 기계가 득세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배하게 될 세상이 오고야 말았으니. 불과 몇 년 사이에. 3년 전만 해도 바로 이곳에서 바드를 시연한 결과를 옮기며 갸웃했었는데 이제는 일상의 가장 소소하고 내밀한 고민까지도 제미나이와 나누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이야기도 너무 진부해져 버렸다.

사유가 부재했던 지난 2년. 이곳의 공백은 그 부재를 증명한다. 이곳 뿐이랴. 이력서 또한 공백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 기간에, 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여러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다. 그 거대한 사건들 사이를 비집고 솟아났던 사소한 순간들도. 눈이 시린 푸른 하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바위틈 사이에 피어난 들꽃, 반 년에 한 번씩,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꿈에서나 이룰 사랑이나 전생의 인연의 환생인 듯 주위를 맴도는 나비... 그런 장면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그 찰나의, 그렇지만 찰나이기에 지고에 이를 수 있는, 그런 행복감을 나눌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이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 순간과 감정을 나눌 만한 재주가 나에게는 없는데, 있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차피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끝나 있을 것이 인생인데, 하고 이내 체념하곤 했던 것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이 공백 또는 진공에 존재를 부여했던 것은 그것을 원자들이 운동할, 원자들의 운동을 가능케 할 조건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실로 부재는 역으로 존재의 이유 따라서 필연성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여 일어나라(탈리다 쿰)"(마르코 5:41)! 그대가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을,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Before)... 뼈 아픈 후회(After) : 히스테리의 승화(?)를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들었던 "철학연습"이란 이름의 철학과 전공수업. 내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수업 중 하나. 요새도 수업 준비하면서 혹은 도중에도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이 수업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그런데 오늘의 마들렌느는 당시 같이 수업을 들었던 동학의 발제문. 이면지 활용을 위해 보관해 둔 모양이다. 황지우의 시가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국문학도가 썼나 보다. IMF 직후 대학가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뒤숭숭하던 시절, 그러나 그 수업에서는 모두가 참 순수하고 진지했다. 그런데 마들렌느가 또 다른 기억을 환기했으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잘,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전문)  

그때만 해도 몰랐을 것이다. 이 시의 모든 구절을 매일, 아니 매 순간, 사는 날이 오리란 것을. 아니 에르노가 "단순한 열정"에서 묘사한 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실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리란 것을. 그리하여 인생의 한때를 바로 그 기다리는 일에 고스란히 바치고 그로 인해 하마터면 인생을 망칠 뻔하게 되리란 것을.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이 "내 가슴에 쿵쿵거"리다 못해 나의 모든 의식을 지배하던 그때. 문 앞에 네가 와 있는 상상이 너무도 쉽게 실제로 네가 와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변해버리던 그때.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던 지각의 이론의존/적재성이 철저하고 처절한 경험으로 입증되던 그때. 

그 모든 것들로 멀어진 지금. 같은 발제문에 인용된 황지우의 또 다른 시가 눈에 들어온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니 부어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놓아 주는 바람뿐 ("뼈아픈 후회" 전문)

치기 어리고 날이 서 있으나 그런만큼 제법 날카로운, 청춘만이 느끼고 쓸 수 있는 감성. 그러고 보니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네라"(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과 대조/대구를 이룬다. 한쪽은 나를 사랑하느라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고 다른 한 쪽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결과는 같다. 결국 같은 얘기. 

이제사 드는 의문. 승화와 히스테리의 차이는 원인은 같은데 (실연, 억압된 충동, 실현되지 못한 욕망 등등) 결과가 다르다는 데 있는가? 다음 학기 수업을 이렇게 시작해 볼까?

수업을 이렇게 사적인 결산(règlement de compte)으로 수단화하면 안 되겠으나... 안될 것은 또 뭔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푸코가 스스로 광기의 나락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쓴 것이 바로 "광기의 역사"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 사실을 시인 김선우의 글에서 처음 접한 후 아직까지 "팩트체크"를 못 했으나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수업에서 다루려는 저자가 푸코를 따르고자 한 것이라면, 이런 사적인 관심과 동기가 학문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온당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한편으로 이 역시 일종의 "승화"이랄 수도? 히스테리의, 히스테리에 의한, 히스테리를 위한 승화... 이 모든 것이 광기의 발로가 아니라면!

1월 평가서 + 2월 계획서

날이 다시 추워졌다. 지난주 본가에 다녀올 때만 해도 날이 많이 풀려서 상대적으로 얇은 외투를 걸치고 기차에 탔는데, 도착 후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비가 오는 데다 바람 때문인지 쌀쌀하게 느껴지긴 했다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손이 곱아서 자판을 두드리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추위는 핑계일 뿐.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비단 추위 때문이겠는가. 더군다나 너는 추위를 좀처럼 타지 않는다고 떠벌이면서 주변의 감탄을 사는 일을 즐기지 않았느냐. 더구나 그 감탄에 "보기와는 다르다"는 말이 덧붙여지기라도 하면 한층 들뜨곤 하지 않았느냐. 추위는 핑계, 가공하고 가련한 핑계일 뿐이다. 이전에도 코로나면 코로나, 더위면 더위, 세상 어느 하나 핑계가 되지 않을 것이 없었고 그래서 핑계는 마를 일이 없었다.  그렇게 온갖 핑계의 변주와 향연 속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세월만 보낸 것이 벌써 얼마더냐. 그러는 사이에 방학도 다 지나가고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방학이 말이다.

1월을 시작하면서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기필코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다. 1월 중으로 적어도 한 편, 가능하면 두 편...이라지만 사실 한 편이라도 끝내면 다행인 줄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어쩌면 그조차도 끝내지 못할 거라는 예감까지도 진작부터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과 또한 예감대로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한 절반 정도는 끝낸(그보다는 끝냈다고 생각한) 면역 사유와 행성 사유 논문. 에스포지토와 라투르 두 인물의 사상과 둘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려던 것이 원래 계획이었으나, 라투르가 "행성 사유"라는 말을 직접 쓰는 것이 아니고 라투르보다는 차크라바르티와 육 휘가 라투르의 영향권에서 쓰는 말이기 때문에 좀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팬데믹이 두 사유의 연결의 필요성을 일깨웠음을 보이는 것이 관건. 조금만 집중해서 정리하고 종합하면 되거늘 그게 안 되어서 1월 첫 번째 마감을 놓치고 두 번째 마감마저도 놓치고는 오늘에 이른 것이다. 

역시 핑계에 지나지 않으나 일을 많이 벌인 것도 사실이다. 동료들과 이름하여 인공지능 세미나를 시작해서 인공지능 윤리나 그 밖의 이론/담론을 살피고 있다. 또 "제자"와 프랑스철학 세미나도 시작해서 지난 학기 대학원 수업에서 읽었던 코이레 2차문헌을 읽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인문대 소식지나 잡지 기고문을 수정하는 데도 꽤 많은 공과 시간을 들였다. 거기에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논문 작성법 특강까지. 

그 와중에 1월 중순에는 1주일간 디지털인문학 겨울학교에도 참가했다. 애당초 목표대로 아마도 나만 빼고 다들 알고 있었던 듯한 "파이선"이 뭔지 대강 알고 실습까지 해봤다는 것으로 만족... 하기보다 이 방법을 내 필요에 맞게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이를테면 당장 번역서 색인 작업이라든지. 앱을 개발할 수도 있겠고. 그러나 네트워크 분석 등 "멀리서 읽기"라는 디지털인문학 방법론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고 인문학의 본령과 본분은 어디까지나 "촘촘하게 읽기" 즉 개념과 사상의 분석과 종합에 있다 할 것이다. 겨울학교 강사진 대부분이 이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한 일을 적는다 해서 해야 할 일 또는 했어야 할 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해야 할"일과 "했어야 할 일" 또는 "할 수 있었던 길"은 원래부터 가능태 같은 걸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 일"과 똑같이 그리고 동시에 생긴 일이다(베르그손). 오직 "한 일"만 있고 "한 일"은 "한 일"일 뿐이고 남은 것은 "할 일" 뿐. 아래에 그 일들을 적어보기로 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페이스북의 한 "친구"가 2월의 계획을 빼곡하게 적은 것을 보고는 경외심과 경각심이 생긴 탓이다.

2월 들어서 다른 건 몰라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두 가지가 있었다. 다음 학기 대학원 수업에서 다룬 후 올해 안으로 완역하기로 한 디디-위베르만의 텍스트 번역과 다음 학기 학부 수업 교재인 두뇌보완계획 100. 각각 하루에 6쪽 및 3장씩 나가기로 했는데 전혀 손대지 못한 채로 일주일이 흘러 버렸다. 실은 지난주 아니 지난 주말까지도 1월 마감 논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던 탓...이라는 것 역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거기에다 조금 전 부주의로 과일향이 첨가된 비타민 음료를 들이키고 말았으니... 아직까지는 괜찮으나 조금이라도 반응이 올라치면 내일 아침으로 예정된 프랑스철학 세미나를 취소할 참이다. 오늘 아침 인공지능 세미나가 명목상으로는 내 본의는 아니었으나 사실은 그 누구보다 바라마지 않았던 나의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취소된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그렇지만 과일이 들어가지 않은 비타민 음료를 겨우 찾고 또 판매처를 겨우 찾아서 10개들이 한 상자를 사다가 냉장고에 채워 놓은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손님용으로 단 한 병 남겨두었던 과일향 첨가 음료를 집어들어 마시고야 말았으니 기가 차도 한참은 찰 노릇인 것은 사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빨리 시작해야 한다. 

...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1. 문제의 면역 사유-행성 사유 논문 완성 및 투고. 거절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이번에는 끝을 내야 한다. 두 가지의 저널 옵션이 있는데 일단은 완성이 우선. 2월 18일까지. 

2. 코이레 해제를 위한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사 논문. 일단 얼개를 짜고 견본으로 삼을 만한 "역자 해제" 탐색 및 탐독 중. 너무 많아서 탈이다. 게다가 너무 많이 보면 겸손을 넘어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역할모델과 선례와 범례야말로 다다익선. 그 밖에 관련 참고문헌 정리 그리고 기존의 쿤 번역서들을 참조해서 초벌 번역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2월 말까지.

3. 젠더연구소 학술대회 사회.  그냥 사회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사회만 보면 그뿐인 것도 아니라 준비가 필요하다.  2월 20일.

4. 여이연 강좌. 버라드의 물질이론과 양자역학과 영화 "오펜하이머" 등.  지난 가을 인문학 강좌에서 출발하되 한참은 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당시 쓰려다 역시나 포기한 논문...의 일부는 이미 출간이 되었는데, 남은 부분도 내용상으로는 상당하고 중요성 또한 상당하다. 사실은 좀더 핵심적인, 그런데,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래서 비껴갔던 부분을 이제는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2월 22일. 이걸 더 발전시켜서 3월 여성철학회에서 발표하고 4월 학술지 투고. 

5. 세계철학자대회 발표 신청. 세계철학자대회는 8월 로마에서 열리는데 사실 그보다 7월 빈에서 열리는 과학철학사 학회에 관심이 더 있었으나 발표 신청 마감. 세계철학자대회도 원래 1월 말까지였으나 3월 말로 마감이 연장되었다. 마감이 연장되기도 했고 번역서 자료 조사 차원에서 파리에도 들러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지원을 해보기로 마음먹었으나 뜻대로 될지... 주제는 ㄱ. 광기의 역사와 ㄴ. 코이레-메를로퐁티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중에서 고민 중. 3월 말.

6. 그 밖에 다른 학회들도 있고 또 지원사업도 욕심이 나지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연구재단의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을 차라리 코이레-메를로퐁티 혹은 더 넓혀서 "고전시대" 연구로? 박사논문의 연장선상으로 말이다. 칸트, 라플라스, 콩트, 쿠르노, 베르그손, 푸앵카레... 영어 논문 출간을 목표로. 한편으로는 중복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베르그손 번역을 아카넷 고전번역에 지원해야 하는데 아마도 올해는 힘들 것이다. 아닌가? 올해 일단 내보고? 어쨌든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신진연구자사업은 지원은 3월 6일까지. 

... 이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일단은 여기까지. 이미 지나친 감이 있다. 모자람만 못할 리만치.


첫 수업을 앞두고 다시 펼쳐 보는 "교육철학기술서"

 “세계의 기원은 모든 사유하는 인간이 끊임없이 천착해 온 문제다. 별들로 가득한 우주를 바라보면서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묻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리 푸앵카레가 『우주생성 가설에 관한 강의』의 서두에 한 말입니다. 도시에서 자란 제게 별이 빛나는 밤을 직접 목격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질문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중학생 시절, 과학 대중화 서적과 잡지들을 통해 천체물리학과 우주론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이성이 제기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이성 자신 힘만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는 사실, 그리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오직 사유를 통해 무한한 공간에 접근한다는 사실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론 천체물리학자의 꿈을 안고서 자연과학대학 자연과학부에 진학, 전공으로 물리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전공을 택한 후 정작 제 관심을 끈 것은 전공과목보다는 교양수업에서 접한 인문 · 사회과학이었습니다. 특히 여성학과 철학 수업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전회를 겪었습니다. 근원적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그 문제의 의미, 타당성, 가치, 그리고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문제 자체, 나아가 인간의 지적 사유 전반에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철학을 부전공으로 택한 뒤,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고자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공부한 철학과 대학원은, 당시 한국 서양철학 연구의 전반적인 풍토가 그러했듯이, 영미 분석철학 전통이 강했고, 대학원 수업과 세미나를 통해 분석철학 특유의 논증적 스타일을 익히면서 철학도로서 더할 나위 없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석사논문  “수학의 적용과 그 존재론적 함축”은, 수학의 수학 외적인 것에 대한 적용을 하나의 수학철학의 문제로서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학적 대상들의 존재론적 위치를 가늠하고자 한 하나의 시론으로, 당시까지 제가 거친 지적 여정과 훈련을 종합한 결과물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석사과정 내내 저는 다른 방법론에 대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가스통 바슐라르, 조르주 캉기엠, 미셸 푸코라는 세 이름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과학철학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과학과 지속적인 대화를 추구하고 또 그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참조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과학철학은 구체적인 과학적 사실들과 과학사 전반의 흐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흔히 “역사적 인식론”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독특한 전통을 보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저는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고, 파리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연구 주제를 찾던 중에 앙리 푸앵카레라는 이름과 조우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릴 적부터 고민해 온 바로 그 문제, 즉 우주의 기원에 관한 강의를 이 위대한 수학자가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박사논문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연구된 바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이 강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한편으로는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고전우주론을, 다른 한편으로는 푸앵카레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푸앵카레 연구와 우주론의 역사 및 철학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파리라는 도시의 지역적 이점, 그리고 제가 속한 과학철학 및 과학사 과정 및 연구소의 특수성 덕분에, 저는 고전 및 현대 물리학과 우주론의 철학과 역사라는 제 연구 주제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배우고 또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인 학회와 세미나에 참여하는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학위 논문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학부 시절 저는 야학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면서 동료들과 교재를 집필하거나, 학과 학생회 소속으로 신문을 제작하는 등, 학과 외의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에서는 학업과 학업 외 활동의 병행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저는 학업과 동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학생회 편집부 소속으로 대학원신문을 만들거나, 당시만 해도 처음으로 시도되고 있었던 학부 토론수업의 조교를 맡아 수강생들 사이의 토론을 직접 진행한 일이 그것입니다. 

석사 졸업 후 유학을 준비하던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저는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과학기술과여성위원회나 과학기술 내 여성 참여(WISE, Women in Science and Engineering)와 관련한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습니다. 동시에 『아나키즘의 역사 (원제 L'histoire de l'anarchisme)』를 번역 출판하는 과정에서 역자 후기를 담당하는 등 후반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한편 프랑스 사회의 현안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 학술서 『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을 동료 유학생들과 공동으로 저술했습니다. 그 밖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고등학교의 철학 교육, 콜레주드프랑스와 같은 고등교육기관이나 국제철학학교와 같은 비제도권 교육기관에서 열리는 다양한 수업들, 그리고 라디오프랑스와 같은 공영매체에서 대중을 상대로 진행하는 철학 관련 프로그램들 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철학 교육 체계 전반과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학문 안팎의 경험들이 지적 자양분이 되고 있었음을 저는 “철학의 이해”나 “영화로 생각하기”와 같은 교양수업들을 강의하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학부 시절부터 과학철학과 관련해서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커리큘럼을 경험했다고 자부합니다. 철학과 전공과목으로 개설된 과학철학 수강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철학도의 길을 걸으면서부터는 영미 과학철학 중심의 독회에 참여하는 한편, 제도권 안팎의 여러 수업과 세미나도 찾아다니면서 과학학 전반을 두루 접했습니다. 대학원 석사 시절에는 “철학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제목의 학과 조교를 맡아 토론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또 “과학기술의 인식론과 역사”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던 파리 유학 시절에는, 과학철학 일반이나 물리의 역사와 철학에서부터, 역사학 방법론, 과학사 사례 연구, 과학사회학, 기술의 역사와 철학 등을 배우는 한편으로, 그리고 파리에서 열리는 다양한 관련 학회와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다양한 분야와 시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철학 강의는 제게 지금까지 가장 많이 보고 배우고 또 생각해 온 내용을 정리하고 전달할 최적의 기회요, 또 수강생들에게도 비교적 보기 드물게 다채로운 교수자의 경험을 공유할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 2020년 6월에 적은 글을 2023년 8월 마지막날 옮기다


왜 하필 이 시점에

이곳 생각이 났을까. 마감을 이미 넘겨버린 발표문 때문인가? 자포자기? 일생일대 중요한 일들 중 몇 개를 줄줄이 앞두고 그제부터 일이 이상하게 풀리지 않는 느낌. 불안감. 아이폰으로 글을 적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이 아이폰 SE의 성능이 저하된 탓도 있는 듯하다. 애플 뮤직의 굿 바이브 리스트를 틀었는데 라나 델 레이의 나른한 목소리가 나온다. 가사가 달달해선가? 숙대입구에서 충무로 가는 길...

급히 마무리하던 글을 다시 꺼내다. 지금은 이 글을 처음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후, 그리고 지금은 다시, 아니 어쩌면 여전히, 충무로다. 

이제껏 이곳에서 지켜오던 원칙을 깨고 지명을 약자가 아닌 실명으로 적은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었을까? 이 글이 제대로 마무리되었다면, 즉 적어도 통상적인 과정을 거쳤더라면, 그 과정 중에 검열이 시행되었을 것이고 그러면서 익명화 처리도 이루어졌으리라. 그러나 이번에는 2개월 전의 기록을 있는 보존한다는 취지에서 그대로 남기기로 한다.

지난 2개월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 중 하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지난 2년도 그랬다. 2번의 이직. 그리고 그보다 최소한 2번의 이사. 그 외에도 자잘한 이동이 여러 번이나.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15년 가까이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면서는 정작 한 곳에서 10년을 넘게 살았던 반면, 귀국 후 비로소 원주민/토착민으로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 만한 조건을 갖춘 이후로는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유목민으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다 지난 2개월 사이에는 이제껏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도시에 한 달 새 두세 번을 드나들었고 급기야 오는 9월부터는 바로 그 도시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제 조금은 더 안정적인 삶을 구가하게 된 셈. 그렇지만 당분간은, 적어도 앞으로 1년 간은, 안정까지는 힘들겠고 그저 준안정 상태 정도만 바랄 뿐.

그런데 왜 또 하필 이 시점에 이곳 생각이 났을까? 

우선은 이사를 1주일 남겨둔 상태... 라는 것이 이유겠다. 이것이 어떻게 이유가 될 수 있냐고? 좋게 말하면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예의 그 고질적인 현실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가 하면... 도대체 할 일이 한둘인가? 

우선은 쓰던, 아니 실은 거의 시작도 안 한, 논문을 20일까지 내야 하는데... 20일이 바로 이삿날이고, 이래저래 정리할 시간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논문은 15일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 15일은 마침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 개봉일이다. 마침 이 논문은 양자역학 (어쩌면 그리고/또는 양자장론!)에 관한 것이므로 어쨌든 관련 내용을 다루고 마침 개봉까지 한 이 영화를 언급하거나 나아가 분석하면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좋은 접근이 되리라 생각된다. 마침 논문에서 다루어야 하는 저자(캐런 버라드)도 양자역학과 원자폭탄을 다룬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니.

방학까지 번역을 대강 마쳐놓기로 한 "히스테리의 발명". 그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원래는 관련해서 논문도 하나 발표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그 상황에서는 벗어났다. 그렇지만 올해 안으로 저 번역을 마쳐야 하는 상황은 그대로다. 그러나 상황 상 오는 겨울방학을 기다려야 할 듯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다른 번역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논문에 대한 부담의 무게를 이전보다는 어느 정도 덜어낸 채로 번역에 임할 수 있게 되어 다행.

기출판 논문 교정 후 개고 및 가이아를 적용한 작품/작가론. 당분간은 불가.

무엇보다도 9월부터 바로 시작할 수업이 무려 세 개나 된다. 게다가 그  중에서 둘은 처음 해보는 윤리학 수업. 물론 이전의 토론 수업에서 윤리학 관련 내용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 바 있으므로 그때 쌓은 콘텐츠를 적극 이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강의는 새롭든 새롭지 않든 늘 부담이긴 매한가지. 

생각해 보니 지난 2개월을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 중 하나"라 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겠다. 6월은 숨가삐 보냈으나 7월에는 하필 코로나에 확진되는 바람에 거의 아무 것도 못 했으니. 차라리 코로나는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확진 후 2주 정도야 증상 때문에 그렇다 쳐도 그 이후에는 그냥 시간을 흘려 보낸 것이다.

조금 아까 잠깐 바깥에 나가 보니 바람이 제법 부는 것이 한여름은 다 지나간 것임에 분명하다. 다가올 가을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고조되는 "8월 말, 9월 초" 시기.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동명 영화(Fin août, début septembre)는 박사과정 동안 그야말로 내 인생 영화였는데 지금이라고 달라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그러나 사실 심정적으로만 그렇고 에릭 로메르의 "가을 이야기(Conte d'automne)"에 보다 가까워진 것이 현실. 대학생이 된 아들을 두고 아들의 여자친구와 우정을 나누며 그녀의 전 남자친구이자 고등학교 철학교사였던 동년배 중년 남성의 소개를 받는 중년 여성을 그린 그 영화 말이다. 왜 하필 이 시점에 이 영화가 생각났는가 하면... 며칠 전 그 영화 주인공의 나이를 넘어섰기 때문일 수 있겠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과의 불화를 끝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인 것만은 분명하다.


Fell in Love with My Parents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부모님과!

부모님의 결혼 45주년에 부쳐


귀국 후 4년 남짓한 시간의 대부분을 부모님과 보냈다. 타지에서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생활을 오래 지속해 오다 고향 서울로 돌아와 말 그대로 “이동의 자유”를 얻었건만, 이 자유를 만끽하자니 또 사정이 여의치 않고, 오랜 독신 생활에 지쳐 이제는 혼자 노는 일을 더 이상 예전처럼 좋아하지 않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내게 손을 내밀어 주신 것은 부모님이 거의 유일했던 것이다. 때로는 사위는 언제 데려올 거냐고 혀를 끌끌 차시거나 당신들과 노느라 사람을 못 만나는 게 아니냐고 안타까워도 하셨지만. 부모님이 아니면 놀아줄 친구도 없고 “사위”는 더더욱 찾기가 불가능한 것이 또한 현실이었으니. 

하여간 그렇게 해서 우리 셋은 여느 젊은 연인들이나 친구들 부럽지 않게 서울, 그리고 때로는 춘천의 곳곳을 누비고 맛집을 찾아 다녔다. 

같이 다니면 두 분이 앞서고 나는 뒤쳐지는 일이 잦다 (또 다른 에우뤼디케 상황? 에우리디케 상황은 나의 운명인 것인가?) 그렇게 두 분을 따라 갈 때면 어릴 적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동생과 뒷좌석에 앉은 나는 잎좌석의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늘 긴장하곤 했다. 다른 부부도 그리 다르지는 않거나 부모님이 유난한 사례는 아니라 생각되지만 두 분은 자주 다투는 편이었다. 특히 할머니댁이나 외가로 향하는 길이면 영락 없었다. 

다행히도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건축공학과 출신 엔지니어인 아빠와 가정관리학과 출신으로 인테리어를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전공에 충실(?)하게 남은 엄마의 공통 관심사는 건축이었다. 아빠야 전공이니 그렇다 치지만 엄마도 못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지나가다 특기할 만한 건축물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마리오 보타, 페이, 가우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코르뷔지에, 김수근, 김석철, 김중업 (아래 사진의 붉은 벽돌 건물은 얼마 전 연희동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김중업 작품이다) 등 유명한 건축가 이름도 자주 오르내렸다. 

두 분의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흐를 때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선은 분쟁이 아니라는 사실에 긴장을 풀고 안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런 대화를 나누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고 뿌듯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전부터 나의 자랑이었다. 부모님이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이상으로 나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웠다. 독립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을 하시거나, 부나 명예나 권력 등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시거나, 세속적 기준에서 “성공”을 하신 건 아니다. 만약 그러셨더라도 그걸 그리 자랑스런 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내게 자랑스러웠던 것은 부모님의 젊은 감각과 풍부한 교양과 넘치는 활력이었다. 그리고 두 분 사이의 금실. 가끔, 아니 자주,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유지되어 왔다. 무려 45년 동안이나.

그런 두 분과 15년을 떨어져 지낸 뒤 다시 같이 살게 된지 4년. 그 사이에 두 분은 연로해지고, 나는 나대로 중년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게 두 분은 여전히 자랑스럽다. 그런데 이제는 그저 자랑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자랑스러움을 넘어서 한없이 사랑스럽다.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며 타박하기는 해도 실은 그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커플의 삶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다.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두 분은 “커플룩” 차림일 때가 많다. 주로 아빠가 엄마 옷차림을 보고 그에 맞춰 입으시는 편. 엄마는 질색을 하고 심지어 외출 직전에 옷을 갈아 입으시기도 한다. 그래도 체구가 작은 두 노인이 옷을 맞춰 입고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야말로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장면이란 생각을 한다. 오래도록, 언제까지나 보고 싶은 장면.





다시 돌아온 자기소개서 쓰는 계절에 다시 읽는 "합격" 자기소개서

자기 소개를 겸하여 혹은 대신하여*


지원서를 제출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모집 광고를 뒤늦게, 그것도 마감 하루 전날, 정확하게는 마감 시각으로부터 6시간 전에서야 봤다는 개인적인 사유가 참작될 리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광고를 보고서도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였던 까닭에 6시간 내에 번역문, 기사, 그리고 자기 소개서를 완성하기란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그럴 듯한 변명으로 들릴 리 만무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대개 이런 식입니다. 약속 시간에는 늘 늦습니다. 숙제를 제출할 때나 원고나 기사를 쓸 때면 마감 기한을 넘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시험을 볼 때도 감독관의 짜증이 극도에 달할 때까지 답지를 붙들고 있곤 했습니다. 

왜 이렇게 스스로에게 불리한 진술을 계속해서 늘어놓는지 궁금해 하실 줄 압니다. 프랜시스 윈이 쓰고 정영목이 옮긴 『마르크스 평전』에는 맑스가 「공산당 선언」을 쓰면서 남긴 일화가 나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증상을 알 것이다. 계속 늦추고, 어디 정신을 팔 수 있는 일이 없나 계속 두리번거리고, 당면한 일 외에는 무슨 일이든 할 용의가 있는 상태. 마찬가지로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자 동맹'의 런던 지도자들이 점점 안달하는 태도를 보인 것에도 공감할 것이다. 그들은 1848년 1월 24일 브뤼셀로 최후통첩을 보냈다. […] 마르크스는 보통 마감시간이 다가왔을 때에야 최선을 다했다. 이번 경우도 위의 최후통첩이 효과를 발휘했던 것 같다. […] 마침내 2월 초에 런던에 도착한 문서는 마르크스가 도를레앙가 42번지에 있는 그의 서재의 자욱한 시가 연기 속에서 밤새도록 미친 듯이 휘갈겨 쓴 것이었다.
감히 제 자신과 맑스를 비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윗글을 인용한 것은 글을 쓸 때의 제 행태가 맑스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저 역시 “마감시간이 다가왔을 때에야 최선을 다” 하곤 했었지요. 사실 이런 제 “증상”이 단순히 나쁜 습관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의도적으로 “계속 늦추고, 어디 정신을 팔 수 있는 일이 없나 계속 두리번거리고, 당면한 일 외에는 무슨 일이든 할 용의가 있는 상태”를 부르기도 하거든요. 그 상태를 거친 다음에서야, 즉 마감시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이 충만하게 발휘되고, 또 그런 만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곤 했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웹진은 공적인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못된 버릇이 초래할 수 있을 위험한 결과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그것이 가져다 줄 수 있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요. 위에서 쓴 것과 같은 시간 관념을 타인에게 피해가 줄 정도로 남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덧붙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숙제를 늦게 제출해서 감점을 받거나 약속에 자주 늦었다는 이유로 애인으로부터 헤어지자는 통고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원고를 펑크내거나 편집 일정에 차질을 줄 정도로 늦게 보내는 일은 없도록 스스로를 모질게 다그친다는 것이지요. 

제가 <컬티즌>의 필진으로서 일하기에 부족하기는 할지언정 부적합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글 쓰는 사람들의 나쁘지만 그렇게 나쁘지만 한 것은 아닌 버릇을 가졌다는 점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제게는 어떤 것에 대해 한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만 하면, 아무리 그것이 전혀 몰랐던 분야에 속해 있는 것이었을지라도, 어떻게 해서든 이해가능하게끔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제게 이러한 특별한 재주가 있음을 깨달은 것은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 대학원신문의 편집에 참여하면서부터였습니다. 물리학을 전공하던 학부 시절부터 저의 관심사는 무척 다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오로지 한 곳에 온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핀잔을 듣곤 했었지요. 그런데 대학원신문사에서 학술 기사를 기획하거나 작성했던 경험을 통해, 저의 이 리좀과도 같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강점으로 내세울 방법이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이 학술 논문보다는 학술 기사를 쓰기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자각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각각의 지식을 얕은 수준으로 아는 데에 만족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붙들고 매달릴 만한 주제를 발견하면, 그에 대해서는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해서 꽤 그럴듯한 분석적인 그리고/또는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곤 하지요. 이때의 집중력에 위에서 말씀 드린 “최후 통첩” 효과가 곁들여지면 더더욱 말씀드릴 것도 없겠지요. 제가 대학원신문 일을 좋아하고 또 부끄럽지 않게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아나키스트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아나키즘 이론에 밝지도 않았음에도 『아나키즘의 역사』(장 프로포지에 지음, 이소희 • 김지은과 함께 옮김, 이룸: 2003)라는 책의 번역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겁니다. 

저는 철학과 대학원에서 수학 및 과학에 관한 논문을 쓴 뒤에 지금은 파리 7대학에서 프랑스 인식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컬티즌>이나 그 밖의 다른 인터넷 언론들을 통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위치해 있는 곳의 “지정학적” 조건을 이용해서 무언가 다른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컬티즌>이라는 공간에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직도 가끔은

너는 알까
아직도 가끔은
네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걸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면
유난히 생각이 많이 나
가슴이 빗소리에 맞추어 뛰다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어
간신히 붙잡아 둔다는 걸

너는 알까
아직도 가끔은
언젠가 우연히 널
마주치는 상상을 한다는 걸
오늘처럼 봄비가 오거나
아니 모두가 들뜬 금요일 저녁이면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약속 없이 혼자 거리로 나서
우연히라도 마주칠 네게 건넬
첫 마디를 연습한다는 걸

너는 알까
아직도 나는 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네 생각 뿐이란 걸
어쩌다 보니 이제껏 
너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어쩌면 앞으로도 평생을
이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글프고 약올라 죽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위기 전 생산으로의 회복을 거부하기 위한 철벽 행동의 상상 (브뤼노 라투르)

* 번역의 변 : 브뤼노 라투르가 작년 코로나19 팬데믹이 본격화하던 시점에서 쓴 글로, 이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글본이 없길래 임시로 해보았다. 수정 후 2월말 정도에 페이스북에 올려 의견을 수렴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라투르측에 요청해서 원문 게시글에 추가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 원문 출처 : Où atterrir après la pandémie? ; Where to land after the pandemic?



위기 전 생산으로의 회복을 거부하기 위한 철벽 행동의 상상

 

브뤼노 라투르 

AOC 2020년 3월 20일

 

의료진이 “현장에” 있고,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또 많은 유가족들이 고인을 묻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기 이후에 대한 상상은 아마도 부적절할 것이다. 그렇지만 투쟁은 바로 지금이다. 구 기후 체제는 지금까지 다소 공허한 투쟁의 대상이었다. 일단 위기가 지나고 경제가 회복된 후에도 구 기후 체제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바로 지금 맞서 싸워야 한다. 실제로 현재의 보건 위기는 위기라기보다는 (위기는 언제나 일시적이게 마련이다) 지속적이고 불가역적인 생태적 변이에 각인되어 있다. 우리가 운이 좋다면 전자[보건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후자[생태적 변이]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두 상황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의 관계를 잘 살피는 것은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어쨌든 이 보건 위기를 수단으로 삼아 생태 변이를 맹목적이 아닌 다르게 맞이할 기회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가장 황당한 것이기도 하다. 단 몇 주일만에 전 세계가 동시에 경제 체제를 중단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모두가 속도를 늦추거나 방향을 돌리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바로 그 경제 체제 말이다. 생활 양식의 전환에 대한 생태주의자들의 논증은 “진보라는 기관 열차”의 비가역적인 힘에 대한 논증으로 반박되어 왔다. 즉 “세계화 때문에” 열차는 선로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지구화라는 특성 때문에 그 유명한 진보도 흔들리게 되었다. 단번에 제동이 걸리고 멈출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지구의 세계화는 다국적 기업이나 상업 협약이나 인터넷이나 “관광 해설사/가이드”만의 소관은 아니다. 이 행성 위의 각 존재자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필요한 순간에는 다른 요소들과 결합해서 집합적인 것을 구성한다. 공기 중으로 확산되어 지구의 대기를 높이는 이산화탄소가 그러하고, 신형 독감을 옮기는 철새도 그러하다. 코로나바이러스도 마찬가지임을 우리는 고통스럽게 되새기고 있다. “모든 인간”을 잇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역량은 겉으로 보이게는 무방비한 우리의 비말이라는 수단으로 전달된다. 마치 미생물들이 수십 억 인간들을 어느 정도까지는 재사회화할 사명을 띠고 세계화 혹은 반(半)세계화의 주역을 맡기라도 한 듯이 보인다.

이로부터 믿기 어려운 사실이 확인된다. 세계 경제 체제가 적색 경보를 모두에게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게다가 이 체제는 커다란 금속 손잡이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 지도자들이 그 손잡이를 당기는 즉시 “진보의 기관 열차” 또한 요란한 제동 소리를 내며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착륙[지구로의 귀환]을 위해 90도 각도로 선회하라는 요구는 지난 1월[2020년 1월]까지만 해도 달콤한 환상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에 훨씬 가까워졌다. 모든 운전자들은 안다. 도로를 이탈해서 벽을 들이받는 일이 없도록 구원의 손길을 바란다면 속도를 낮춰야 한다는 사실을.

세계화된 생산 체계가 갑작스럽게 멈추면서 지구 귀환 프로그램을 추진할 더 없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불행히도 생태주의자들만의 일은 아니다. 20세기 중반부터 행성의 구속을 벗어난다는 생각을 발명한 세계화의 주역들 또한 그들을 세계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로부터 급진적으로 단절할 더 없는 기회라 여긴다. 그들에게는 복지 국가, 가난한 자들의 안전망, 오염 방지를 위한 규제책 등을 해체하고, 또, 보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이 행성에 짐이 되는 모든 초과 인원을 제거하기 위한 너무나도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1]

이 세계화주의자들이 생태적 변이를 의식하면서도 기후 변화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한편, 지난 50년간 그 결과를 피하고 특권으로 무장한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요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진보의 열매”에 대한 보편적 분배라는 근대인의 위대한 꿈을 믿을 만큼 소박하지 않다. 그러한 환영마저 남기지 않을만큼 솔직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새롭다.[2] 매일같이 폭스 뉴스에서 발언하고 또 모스크바, 브라질리아, 뉴델리, 워싱튼, 그리고 런던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기후 회의주의 국가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현재의 상황을 그토록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매일 같이 늘어나는 사망자들이 아니다. 경제 체제의 전반적인 중단은 특히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재고”할 경이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화주의자들이 패배했음을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 기후 변화의 부정이 무한정하게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 지구상의 다양한 지층들과 그들의 “개발” 사이에서 화해할 기회는 더 이상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경제도 예외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무든 수를 써서라도 좀더 지속가능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보호할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태세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세계의 멈춤”이라는 제동, 이 예견되지 않은 휴식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달아날 기회를 제공한다.[3] 이 순간, 그들이야말로 혁명가다.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다. 그들에게 기회가 열린다면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열린다. 모든 것이 멈춘다면 모든 것이 재고되고, 변경되고, 선택되고, 분류되고, 중단되거나 반대로 가속될 수 있다. 바로 지금 전수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가능한 빨리 생산을 재가동하자”는 양식의 요구에 “그렇게는 안 된다”는 일성으로 답해야 한다. 무엇보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우리가 이전에 했던 것과 똑같이 회복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텔레비전에 눈물을 머금은 한 네덜란드 화훼업자가 나왔다. 그는 고객이 없어 비행기로 전 세계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던 수톤의 튤립을 폐기해야 했다. 불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피해 보상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카메라는 곧바로 뒤로 물러나는데 그때 그의 튤립이 인공 조명에서 자란 뒤 바다에 석유를 뿌려대는 쉬폴이라는 화물선으로 이송될 것임을 보여준다. 거기에서 의심이 싹튼다. “그런 종류의 꽃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그러한 방식을 연장하는 일이 과연 유용한가?”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 각자가 우리 생산 체계의 모든 면에 대해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효과적인 세계화 방해꾼이 된다. 우리는, 비록 수백만에 불과하기는 해도, 지구의 세계화에 있어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지구를 세계화시킨 저 유명한 코로나바이러스만큼 효과적일 수 있다. 바이러스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미미한 비말로써 세계 경제의 멈춤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무의미한 작은 행동으로써, 행동에서 행동으로 전함으로써 생산 체계의 멈춤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각자 질문을 던지면서 거부 행동을 상상한다. 이것은 바이러스에 대한 대항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복구하지 않기를 바라는 생산 양식에 대한 대항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단지 생산 체계를 회복하고 변경할 것이 아니라 생산을 세계와 관계를 맺는 유일한 원리로 간주하는 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4]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픽셀(화소) 단위로의 분해다. 피에르 샤르보니에가 보인 것처럼, 경제에서 이윤의 재분배에만 치중한 지난 100년 간의 사회주의 이후, 어쩌면 이제는 “생산 자체”에 반기를 드는 사회주의를 발명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5] 불의는 진보의 열매를 재분배하는 방식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풍요롭게 만드는 방식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산을 축소하고 사랑과 신선한 물로만 살자는 것이 아니다. 소위 비가역적이라는 체계의 각 부분들을 선택하고, 소위 필요불가결한 연결들을 재고하며, 무엇이 바람직하고 무엇이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은지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이 부과된 시간을 우선적으로는 각자가, 그리고는 춤, 기술하는 데에 사용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로부터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다시 꿰거나 아니면 행동을 통해 끊겠다고 결심한 사슬은 무엇인지. 세계화주의자들은 재개 이후 그들이 무엇을 재생하고자 하는지 매우 분명히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못지 않게 분명하되 더 나쁜 것은 석유 산업과 고급 유람선이다. 그들에게 반대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한두 달 안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새로운 “사회적 거리”를 배우고, 보다 연대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병원이 과부하되지 않도록 집에 머물 수 있다면, 이 새로운 철벽 행동의 변화에 대한 잠재력을 상상할 수 있다. 동일한 것의 재개에 대항하기 위해서. 또는 그보다 나쁘게는, 지구 중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완충 장치에 대항하기 위해서.


철벽 행동을 위한 길잡이


주장은 실천적 수행과 연결하는 것이 좋다. 독자에게 이 간단한 설문을 제안한다. 설문은 직접 체험된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할수록 더더욱 유용할 것이다. 관건은 당신의 머리에 와닿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황을 기술하고 나아가 또 다른 설문으로 확장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여러 기술들을 중첩해서 풍경이 생성되도록 답변을 한다면, 당신은 구체화되고 자세한 정치적 표현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는 불가능하다.


주의할 것은 이것이 질의서도 설문 조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기 기술을 위한 길잡이이다.[6]


이제 할 일은 현재의 위기에서 어떤 활동으로 인해 당신이 박탈감을 가지고 당신의 삶에 본질적인 조건에 위협을 느끼는지 알아보고 그러한 활동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각각 활동에 대해서 당신이 (예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재개하고 싶은지, 더 하고 싶은지, 아니면 전혀 재개하고 싶지 않은지 선택할 수 있다. 다음의 질문에 답해 보라.

 

1.     지금 멈춘 활동 중 당신이 재개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2.     다음을 기술하라. ㄱ) 왜 그 활동이 당신에게 해로워/불필요해/위험해/비일관적으로 보이는가? ㄴ) 그 활동의 종식/일시 중지/대체가 당신이 선호하는 다른 활동을 보다 용이하게/더 일관적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점에서인가? (질문 1.에 대한 답변에서 열거된 각 항목에 대해 별도로 답변할 것)

3.     당신이 멈춘 활동을 계속할 수 없는 노동자/직장인/수행원/기업가들이 다른 활동으로의 전환을 용이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려면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4.     현재 멈춘 활동 중 당신이 발전되거나 재개되기를 바라는 것은? 혹은 어떤 활동이 대안으로 발명되어야 하는가?

5.     다음을 기술하라. ㄱ) 왜 그 활동이 당신에게 긍정적으로 보이는가? ㄴ) 그 활동은 어떻게 당신이 선호하는 다른 활동을 보다 쉽게/조화롭게/일관적으로 만드는가? ㄷ) 또 당신이 비호감을 표시한 활동에 맞서 저항하도록 만드는가? (질문 4.에 대한 답변에서 열거된 각 항목에 대해 별도로 답할 것)

6.     노동자/직장인/수행원/기업가들이 그 활동을 재개/발전/창조할 역량/수단/도입/소득/도구를 취득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다음으로는 당신의 기술과 다른 참여자들의 기술을 비교할 방법을 모색하라. 답변을 모으고 겹쳐서 보면 충돌, 연합, 논쟁, 대립의 선들로 이루어진 풍경이 서서히 그려질 것이다.)


[1] 미국의 고삐 풀린 로비스트들에 관한 마크 스톨러의 기사를 보라 :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코로나 바이러스 구체책은 기업들의 한 탕이 될 것이다.” 『가디언』, 2020년 3월 24일,

[2] “우리는 더 이상 같은 행성에 살지 않는다”, AOC 2019년 12월 18일.

[3] Danowski, Deborah, and Eduardo Viveiros de Castro. “L’arrêt de monde.” De l’univers clos au monde infini (textes réunis et présentés). Ed. Hache, Emilie. Paris: Editions Dehors, 2014. 221-339. [드보라 대노프스키,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세계의 멈춤」, 『닫힌 우주에서 무한 세계로』, 에밀리 아슈 편, 2014]

[4] Dusan Kazic, Plantes animées- de la production aux relations avec les plantes, thèse Agroparitech, 2019. [『살아 있는 작물 : 작물의 생산에서 작물과의 관계로』. 파리농업공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5] Pierre Charbonnier, Abondance et liberté. Une histoire environnementale des idées politiques. Paris: La Découverte, 2020. [피에르 샤르보니에, 『풍요와 자유 : 정치 사상의 환경사, 2020』

[6] 자기 기술은 『어디에 착륙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정치적 방향성을 잡을 것인가』에서 제안되었으며 이후 일련의 예술가, 연구자들에 의해 발전된 새로운 진정서(cahier de doléance)의 절차를 복구한 결과물이다.

무와 무한 (2) 유한의 무한 도전 : 세계와 정신의 한계에 관한 사유 (2019년 11월 16일)*

 서론 : 역설,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무한 개념의 기원과 분류 : 물리적 무한과 수학적 무한, 가무한과 실무한

역설의 보고(寶庫)로서의 무한

물리적 무한과 그 역설

그리스의 유한 우주와 그 역설

근대 무한 우주의 도입

밤하늘은 왜 검은가? 올베르스의 역설 칸트의 이율배반

수학적 무한과 그 역설

연속과 무한 : 제논의 역설

무한은 얼마나 작은가? 미분의 도입과 무한소 무한을 셀 수 있는가? 힐베르트의 무한 호텔 무한은 얼마나 큰가? 칸토어의 역설

결론 : 무한과 한계, 그리고 역설의 가치


별첨(인용구)

1° 모순율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위배를 거두어야 할 필요가 우리로 하여금 수학적 연속을 발명하도록 강제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개념의 모든 것이 정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또 정신에 이러한 기회를 부여한 것이 경험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앙리 푸앵카레,『과학과 가설』 (1902)

2° 잠재적 존재와 현실적 존재가 있으며, 추가에 의한 무한과 분할에 의한 무한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크기도 현실적으로 무한하지 않고 크기는 분할에 의해 무한하다고 말했다 (분할불가능한 선이 있다는 주장은 쉽게 반박된다). 그러므로 크기는 잠재적으로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크 기가 잠재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을, 잠재적인 조각 작품이 언젠가 현실적인 조각 작품이 되는 것처럼 크기가 언젠가 현실적으로 무한해지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존재는 여러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 무한하다는 말은 특정한 날이나 경기가 있다는 말과 뜻이 같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잠재성과 현실성을 구별할 수 있다. 올림픽 경기는 거행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으로 있을 수도 있고 거행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있을 수도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3° 17세기 혁명에서 비롯된 변화는 코스모스의 해체와 공간의 기하학화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 어졌다. a) 변화와 부패의 영역의 중심인 무겁고 불투명한 지구가 있고, 그 “윗편”에 무게도 없고 부패하지 않으면서 빛을 내는 별들이 위치한 천 상계가 “올라선” 것이 [코스모스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무제한의, 나아가 무한의 우주, 모든 부분 들을 [일괄적으로] 지배하는 법칙들, 그리고 같은 존재론적 수준에 위치한 요소들의 동일성에 의해 서만 통일된 우주가 그것이다. b) 아리스토텔레스 공간관, 즉 세계 안의 장소들의 차등화된 총체였 던 공간이 등질적이고 필연적으로 무한한 연장체 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간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구조상 우주의 실제 공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 될 것이었다. – 알렉상드르 코이레, 『닫힌 세계에 서 무한 우주로 (From Closed World to Infinite Universe)』 (1957)

4° 앞의 것들[무한한 선, 물체의 분할, 별들의 수...] 을 우리는 무한하다고 하기보다는 부정(不定)하다 고했다. 이는 무한이라는 용어를 단지 신에게만 쓰고자 하기 위함인데,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단지 신에게 있어서만 어떠한 한계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떠한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반면에 우리는 다른 것들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와 같이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그것들이 한계를 갖고 있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발견할 수는 없고 단지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 데카르트, 『철학원리』 (1644)

5°모든 사물들이 공유하는 성질들이 있고, 그 성질들에 대한 앎은 우리의 정신을 자연의 가장 큰 경이로움으로 이끈다. 그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경이로움은 모든 사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무한, 즉 무한대와 무한소이다. 어떤 공간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 큰 공간을 상상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것보다 더 큰 공간도 상상할 수 있다. 이 상상은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공간에 도달함 없이 무한히 계속된다. 반대로 어떤 공간이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 작은 공간을 생각할 수 있고, 그 생각은 더 이상 분할불가능한 공간에 도달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된다. 시간도 마찬 가지다. 우리의 한계를 깨닫자. 우리는 한 사물이지 모든 사물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는 무에서 발생하는 최초 원리에 대한 앎을 방해하고, 우리 존재의 작음은 우리의 눈앞에서 무한을 감춘다. [...] 이 무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6° 무한한 공간 전체에 정말로 태양들이 있다면, 그 태양들이 대략 같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분포 하든지 아니면 은하수-시스템들에 속해서 분포하든지 간에, 태양들의 개수는 무한대일 테고, 따라서 온 하늘이 태양에 못지 않게 많아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서 뻗어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직선 각각이 반드시 어떤 항성과 만날 것이고, 따라서 하늘의 모든 지점이 우리를 향해 항성의빛,곧태양의빛을보낼것이기때문이다. – 하인리히 빌헬름 올베르스, 1832

7° 별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면, 밤하늘의 배경은 은하수처럼균일하게밝을 것이다.왜냐하면밤하 늘의배경전체에별이없는지점이단하나도없 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망원경 들이 무수한 방향에서 포착하는 허공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보이지 않는 배경까지의 거리가 어 마어마하게 멀어서 거기에서 출발한 광선이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일 성싶다 – 애드거 앨런 포, 『유레카 : 산문시』 (1848)

8° [모든 사물은] 분할가능하거나 분할가능하지 않 거나 둘 중 하나다. 분할가능한 것은 분할가능하지 않는 것으로 분할되거나 계속해서 분할되거나 둘 중하나다.마지막경우가연속에해당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9° 시간이 어떻게 영혼과 관계하는지, 왜 시간이 땅과 바다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연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만일 영혼이 없다면 시간이 존재할까, 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면, 어떤 것이 셀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어지는 것 혹은 셀 수 있는 것인 수도 명백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는 능력을 가진 영혼이나 영혼 속의 정신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영혼 속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면 시간의 바탕만 존재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0° 사유되지 않는 것은 순전한 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사유만을 사유할 수 있으며, 사물에 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언어란 오직 우리의 사유를 표현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사유 외에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명은 죽음이라는 두 영원 사이의 짧은 일화에 지나지 않고 –시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이 일화에서조차 의식적 사유는 얼마 지속되지 않았으며 오직 한 순간만 지속할 뿐임을 지질학의 역사는 보여준다. 사유란 기나긴 밤의 한 가운데 내리치는 번개일 뿐이다. 그러나 이 번개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 앙리푸앵카레, 『과학의 가치』 (1905)


참고문헌과 동영상

- 존 D. 배로 지음, 전대호 옮김,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 : 가없고 끝없고 영원한 것들에 관한 짧은 기록』, 해나무, 2011
-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전대호 옮김, 『밤을 가로질러 : 밤, 잠, 꿈, 욕망, 어둠에 대하여』, 해나무,  2015
- EBS 지식채널 e “왜 밤하늘은 어두울까”
- 제프 데코프스키 Jeff Dekofsky, “무한 호텔 역설The Infinite Hotel Paradox” on YouTube
- EBS 다큐프라임 “넘버스 2부 – 천국의 사다리,∞”
- 카오스재단, [카오스 술술과학] “도대체 무한이란 무엇일까” 1 & 2 (무한의 신비 & 무한을 세는 법)

*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6강

무와 무한 (1) 무에서 유로 : 우주와 그 기원에 관한 사유 (2019년 11월 2일)*

서론 : 근본적 물음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생성론 (cosmogonie : cosmos+gonos) cf. as- tron+nomos, cosmos+logos, etc.

플라톤 : ‘그럼직한 설명(eikos logos)’으로서의 우 주(생성)론

우주론의 역사와 철학 

우주론의 특수성

우주론의발전단계 : 고대-고전-현대?과학적우 주론은 아인슈타인 이후?

A. 그륀바움 (Adolf Gru ̈nbaum, 1913-2018)

왜 무가 아니라 유인가? : 근원적 실존 문제 (Primordial Existential Question)

PEQ의원형:라이프니츠,자연과은총의원리 (1714)

베르그손의 비판 : 잘못 제기된 문제

그륀바움 : PEQ의 두 전제(무의 자발성과 우연성)

에 대한 비판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

어떻게 무에서 유가 나오는가? ‘무로부터의 창조’와 현대우주론

그리스 철학에서 무/허공의 도입 : 원자론의 이론 적 요구

플라톤 : 데미우르고스의 신화 ; 아리스토텔레스 : 영원우주론

사물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물음으로서의 PEQ cf. 사물의 기원적 생성(1697)

빅뱅의 이전 혹은 기원에 대한 물음

결론 : 종교, 과학 그리고 철학 

최근 종교-과학 담론의 경향


별첨(인용구)

1° 반성을 할 줄 아는 모든 인간은 세계의 기원이 라는 문제에 몰두해 왔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묻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 앙리 푸앵카레 (1854-1912), 『우주생성론 강의』, 1911

2° 언제나 있는 반면 생겨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언제나 생겨나되 결코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확실히 이성적 설명과 함께 하는 사유를 통해 헌 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있는 것인 반면, 비이성적인 감각을 동반하는 판단을 통해 의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일뿐 진짜로는 결코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겨나는 것은 모두 필연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원인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실로 하늘 전체를 놓고 보자면, – 혹은 그 것이 세계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그렇게 불렀을때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이라면, 우리로서는 그렇게 부르도록 하죠. – 어쨌건 그것에 관해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무엇에 관해서든 맨 처음 탐구하도록 제기되는 물음, 즉 그것이 생성의 시초라고는 일절 갖지 않은 채 항상 있어 왔는지, 아니면 어떤 시초에서 출발하여 생겨났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고 만질 수 있으며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요. 그런데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 감각될 수 있으 니, 감각될 수 있는 것들은 감각을 동반한 의견에 의해 파악되는 것들로서, 생겨나고 태어난 것으로 서 밝혀진 것입니다.

사실상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본성에 맞 는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는모상에관해서도,또본에관해서도다음을구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명이란 무엇인가를 해명 하는 것으로서 바로 그 무엇과 동류이니까요. [...] 그러니까 존재가 생성에 관계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리는 믿음에 관계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소크라테스! 여러 가지 점에서, 또 여러 가지 문제들, 예컨대 신들이라든가 우주의 생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그 자체로 일관되며 완벽하게 엄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놀라지마세요. 오히려 정말 우리가 누구 못지 않게 그럼직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 플라톤, 『티마이오스』, 27d- 29d

3° 1917년과 1925년 사이 불과 몇 년만의 일이었다. 한 천재물리학자, 그리고 한 천문학자에 의해 다루어진 거대한 망원경이 우주에 대한 관념과 시각을 자연철학에 들여왔다. 이 만남에서 현대 우주론이 탄생했다. – 자크 메를로퐁티, 『20세기 우주론』, 1965

4°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한 물리학자로서 논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대(大)원리를 이용해서 형이상학으로 올라서야 한다. 그 원리의 내용은 어느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는생기거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사물에 대해 충분히 알기만 하면 왜 그것이 저러하지않고 이러한지를 규정할 충분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고, 그와 다른 방식으로는[즉 사물이 이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원리가 일단 제시되면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무엇인가 있는 것보다 단순하고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물들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것들이 왜 달리 있지 않고 이렇게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원리』, 1714

5° 도대체 우주가 왜 있는가? [우연적인]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살아 있는 존재도, 별도, 원자도, 심지어 시간과 공간조차도. 이러한 [”전무(Null)”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워 보일 수 있다. – 데릭 파핏(D. Parfit), ”The puzzle of reality. Why does the universe exist?”, 1998

6° 그런데 이 질문은 다음을 전제한다. 실재가 허공(vide)을 채우고 있고, 존재의 기저에는 무가 있으며, 당위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어야 하고, 따라서 왜 사실상으로는 무엇인가가 있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이 질문은 순전한 환영이다. 왜나하면 절대적 무의 관념은 둥근 사각형과 다를 바 없는 의미를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부재는 다른 어떤 것의 현존이다 (다만 이 현존하는 대상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관심이 있거나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편을 선호할 뿐이다). 그런 만큼 어떤 것의 제거는 다른 것으로의 대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업은 양면적일진대 우리는 어느 한 면만을 보려 한다. 모든 것의 폐기는 자기 파괴적이요 생각조차 불가능하다. 그것은 유사관념이요 표상의 환영이 다. – 베르그손,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1935

7°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진보는 존재에 의한 존재의 존재에 대한 고려, 그리고 가장 최초의 혹은 초월적 기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이루어졌다. 발전하고 진화하기 위해서 세계는 우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무로부터 존재로 화(化)해야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창조되어야 했다. 본질에 의해 존재하는 최초의 존재에 의해. – 베네딕트16세, 교황청 주관 학술대회 ‘우주와 생명의 진화에 관한 과학적 통찰’ 기조 발언, 2008


참고문헌

- 김혜숙, 『칸트: 경계의 철학, 철학의 경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1.
- 플라톤, 『티마이오스』, 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
- Adolf Grünbaum (2013) “Science and the im- probability of god” (초판에는 같은 글이 ‘Why is there a universe at all, rather than just nothing’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in C. Meister and P. Co- pan (ed), Routledge Companion to Philosophy of Religion, 2nd edition (New York: Routledge).
- 짐 홀트,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역사를 관통하 고 지식의 근원을 통찰하는 궁극의 수수께끼』, 우 진하 옮김, 21세기북스, 2013.


*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5강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무(無)와 무한(無限)은 서양철학 고유의 개념으로,  전자가 유대교-기독교의 유산이라면 후자는 그리스 철학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양자 모두 오직 신에게만 가능하며 심지어 이해가능하다 여겨져 왔지만 실은 인간 정신의 창조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인간이 창조해서 초월적 존재에 부여한 속성인 것이다. 사실 이 초월적 존재의 개념 역시 인간 스스로 창조한 것이다. 이 존재를 창조주로, 그리고 스스로를 피조물로 규정한 것 역시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무와 무한 개념은 도전에 직면한다. 근대 과학(특히 우주론)이 "무로부터의 창조"에 기반한 창세기의 우주론이나 "어떻게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문제로 집약되는 철학(특히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근대 수학(특히 미적분학과 칸토르의 초한수론)은 무한의 접근불가능성 혹은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들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한다. 이 강좌에서는 무와 무한 개념을 둘러싼 철학, 과학, 그리고 수학의 도전과 응전을 다룬다. 

강사 소개

이지선 : 이화여대에서 물리학(전공)과 철학(부전공)을 수학한 뒤,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수학의 적용과 그 존재론적 함축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앙리 푸앵카레의 사상과 17~19세기 우주론의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 프랑스 파리 디드로 대학 (구 파리 7대학)에서 과학철학 및 과학사 ("과학기술의 인식론과 역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 철학, 그리고 가끔은 예술의 경계에서의 사유를 과업으로 삼고 있다. 논문으로 "철학자의 시간과 물리학자의 시간"(철학, 2019)이 있으며, 과학사 고전인 알렉상드르 코이레의 <닫힌 세계에서 열린 우주로>(읻다, 2021년 출간 예정)를 옮기고 있다.

세부 내용

- 우주론의 철학 및 역사 개괄, 그리스의 우주론과 유대-기독교의 우주론, 우주론적 문제와 형이상학의 문제 ("어떻게 무가 아니라 유인가?"), 창조를 둘러싼 개념들 (무로부터의 창조, 연속 창조 등), 고전 및 현대우주론의 도전 등
- 수학의 철학 및 역사 개괄, 그리스 수학에서의 무한 및 관련 개념들 (연속, 악무한과 가무한의 구분 등), 무한소와 미분의 발견, 무한의 역설, 칸토르의 도전과 괴델의 정리 등

참고 문헌

- (생명과 우주에 대한) 과학과 종교 논쟁, 최근 50년 : 빅뱅에서 지적 설계까지 / 래리 위덤 지음 ; 박희주 옮김 (서울 : 혜문서관, 2008)
- 수학의 몽상 : 이진경의 매혹적인 근대 수학사 강의 / 이진경 지음 (서울 : Humanist, 2012)
- 우주, 진화하는 미술관 : 이미지로 보는 우주와 과학의 역사 / 존 D. 배로 지음 ; 노태복 옮김 (파주 : 21세기북스, 2011)
- 옥스퍼드 과학사 : 사진과 함께 보는, 과학이 빚어낸 거의 모든 역사 / 이완 라이스 모루스 외 지음 ; 임지원 옮김 (서울 : 반니, 2019)


*2019년 가을 이화철학연구소 주최 이화인문아카데미 연속강좌  "서양 철학 리부팅_1 신과 인간: 크리에이터 vs 크리쳐", 5, 6강 기획안. 이 꼭지는 내가 기획했지만 꽤 그럴 듯하다. 그에 비해 강의는 준비가 부족해 무척 아쉬웠지만 나중에 이런 구성으로 책을 써보면 좋겠다. 

Windows in (and on) Swiss Embassy


Opening Event, May 2019





베토벤에 대한 사심 어린 진심

 



지니 뮤직의 “베토벤의 사계” 음반 소개. 이에 겸한 추첨 이벤트에 응모했는데 결과는 탈락. 나름대로 정성들여 썼고 쓱 보니 저 정도로 성의 있게 쓴 경우는 드물어서 내심 기대했거늘. 

사심이 동기가 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을 담았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베토벤 현악 4중주가 아니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 하고. 전에는 가볍고 경쾌한 바로크를 좋아하고 낭만파는 진중하고 무거워서 피하는 편이었는데, 몇 가지 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듣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저 위에 적은대로, 인생을 함께 해오고 있다. 프루스트와 고다르, 그리고 프랑스 국영 라디오 방송국의 고전음악 위주 채널인 프랑스뮤직, 그 중에서도 현악 4중주 헌정 방송인 Plaisir du quatuor (4중주의 기쁨), 그리고... 너. 너는 가고 (왔던 적도 없지만), 베토벤이 남았다. 그렇게 계절이 벌써 몇 번째 바뀌고, 너는 여전히 오지 않고 있지만... 베토벤은 영원하다.

Performance at (and around) Swiss Embassy

 Opening Event, May 2019





(부분)

전설의 수련, 수련의 전설

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lUByXVkjX1CFv5MTAacfBioC_4n-5ykN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NgwDYs0tPDrWAeHNBrBvDHpAuKf4z-FL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o5abjE0SvX-_o56h8g1YhdJu6i7wg0nb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Tadgx6jWgTMI1m1Fpul1DHrFAp8Vuhechttps://drive.google.com/uc?export=view&id=1YPV04wZQIVfK1e9BXZBGZKbkpKiCQQf5
춘천, 강원대 연적지
iPhone SE

지베르니 모네의 집에서도 저렇게 연못 한가득인 수련을 본 기억이 없다. 아니 수련 자체의 기억이 모네의 그림으로 본 것 말고는 없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되었던 실재와의 조우. 그런데 조우한 실재는 다시 시뮬라크르로(위의 사진).

에드워드 윌슨은 1993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인류는 자살 성향을 띠는가?”에서 프랑스에서 전해 내려온다는 수수께끼를 언급한다. 연못가의 수련이 한 번 피어나기 시작하면 하루에 두 배씩 늘어난다. 30일 후 연못이 연꽃으로 가득 찬다면 연못의 절반이 채워지는 것은 언제인가? 정답은 당연히 29일째. 환경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든 예다.

이렇게 급수적인 전개는 많은 종류의 위기와 재난에 적용될 수 있겠으나, 또 적잖은 위기와 재난이 돌발적으로 발생하며 그 전개 양상도 변칙적이어서 (가령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31번 환자의 등장과 더불어 확진자 수가 급증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늘 긴장과 경계를 늦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느라 힘이 빠져 정작 위기가 닥쳤을 땐 대처 능력이 없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해마다 아니 날마다 반복되는 이 순환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나도 좀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다.


위험한 소녀의 조용한 일갈


삼청동, 2019년 9월
iPhone 6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 블로그다. 블로그를 방치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언어, 그리고 사유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언어와 사유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호의존적임을.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사유란 자기모순이요 실현은 물론이고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할 말도 쓸 말도 없다는 건 생각이 없다는 것. 그러면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연구한다고 감히 나서 왔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다른 이유는 아이폰 6로 바꾼 후 마땅한 블로깅 앱을 찾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번에 큰맘 먹고 3유로가 넘는 전용 앱을 마련했다 (올케 ㅎ에게 감사).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다른 이유나 핑계나 찾고 뭐고 할 것 없이 무조건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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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에 앞서, 혹은 그와 더불어, 읽자. 이 역시 부끄러운 일이지만 뭐든 제대로 읽은지가 너무도 오래 되었다. 

위의 사진은 지난 9월의 볕 좋은 어느날, 엄마와 삼청동 수제비를 먹고 나오는 길에 찍은 것이다. 보고는 요전 블로그에서 성황리(?)에 진행하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콜렉션이 생각나는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위험한 여자”인지 너무도 오래. 다시 위험해지라, 소녀는 내게 그렇게 일갈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취직해서 얼떨떨한 기분, 계절은 어느새




춘천, 2019년 11월
iPhone 6


인생 최고 흑역사, 계단 인사말... 그리고 흑역사는 계속된다?


- 이전 포스트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인생 최고 흑역사와 후일담 에 이어진 글. 그렇지만 실은 그 글 앞에 쓰여진 글. 인생 최고의 흑역사를 쓴 바로 그날 하루 전에 써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계단 인사말이 되겠다.

3 juil. 2019 à 21:50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책이나 다른 글들로 접했던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 뵙고 또 이렇게 앞에 모시고 발표까지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발표 기회를 주신 학회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아울러 발제문을 사전에 준비하지 못하고, 또, 발표 형식 면에서도, 준비한 원고를 그대로 읽는 (그것도 객석과 공유하지도 않고 혼자서만) 유럽 인문학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점에 대해서도, 양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게는 이 자리가 몇 가지 점에서 감회가 더더욱 새롭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1년 전인 2008년 바로 이 자리에서 세계철학자대회가 열렸고 당시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저는 처음으로 모국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계셨던 몇몇 선생님들을 이 자리에서 다시 뵙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럽 분석철학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택한 주제가 바로 아돌프 그륀바움의 유신론적 우주론 비판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손을 놓고 있었던 이 주제를 소환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지난해, 논문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륀바움의 별세 소식을 접했습니다. 10년 동안 이 주제와 관련해서 발전하거나 달라진 논의는 없는지 확인해 보고도 싶었습니다. 오늘 발표는 차후 이 주제에 대해 보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한 시론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제 김상욱 선생님 발표에서 나왔던 "우주는 심심하다"라는 명언, 기억하실 겁니다. 우주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어떤 의도 없이 생겨나 또 운행되고 있다. 또 그 안의 운동도 특정한 의미 없이 진행된다. 우주에 대한 과학자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고 여기 계신 철학자 여러분도 아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중요한 학회 발표를 앞두고도 준비가 미진한 상황에서 세상이 내일 멸망했으면, 아니 아예 소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혹시 해본 적 없으신지요? (그런 생각 해본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 있는데 누구라고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세상이 소멸해서 없어진 상황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해보게 되는 상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나, 지구나 태양을 포함한 천체들이, 개별적으로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해도, 그 모든 것을 포괄하고 포함하는 총체로서의 우주 전체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사실 상상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주가 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 가능하다. 우주가 없었거나 앞으로 없어지는 일이 가능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이러한 일들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기독교-유대교의 도그마를 거쳐서, 가능할 뿐 아니라 당위적인 사실이 되었고, 이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로 그 문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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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인사말을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설마 발표문을 준비하지 못하고, 발표문을 준비하지 못했더라도 발표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에 내리리라고는, 그리하여 이름하여 "서울역 회군"의 역사를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런데 어제 자정이 마감이라던 그 글은? 아직 못 썼다... 그리고 학회지 담당인 편집이사님께 메일로 슬쩍 마감 연장 여부를 물어봤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학회 대표 계정으로 문의했던 것임을 조금 전에야 알았다. 이쯤 되면 이 학회하고는, 아니 이 학계와는 도통 연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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